■ 독립운동을 도운 공베르 신부
3·1운동에 선교사들은 부정적이었다.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일제의 한국지배를 인정했고, 한국인 신자들의 만세운동 참여를 금지했다. 그러나 안성본당 초대 주임 앙트완 공베르 신부(Antoine Gombert, 한국이름 공안국, 1875~1950)는 신자들의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도운 선교사다.
독립운동이 전개되던 당시 안성지역 사람들은 안성본당의 주임으로 신자들뿐 아니라 지역 사회를 도와온 공베르 신부를 찾아왔다. 사람들이 만세운동을 어떻게 전개하면 좋을지 묻자 “낮에는 국기를 들고 밤에는 등불을 들고 만세를 부르라”고 조언했다. 뿐만 아니라 만세운동을 질서 있게 전개하려면 지휘자가 있어야 함을 강조하면서 천주교 신자인 김중묵을 만세운동의 지휘자로 추천했다.
공베르 신부는 만세운동으로 신자뿐 아니라 안성지역의 모든 사람들이 피해를 당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서 공베르 신부는 운동에 참여하는 이들에게 “본인을 죽이지 마시오. 당신들은 지금 맨주먹이니 일본인을 한 명이라도 죽이면 당신들은 수백 명이 죽을 것이오. 건물도 부수지 마시오. 독립을 해도 당신들이 짓게 되고, 못해도 당신들이 짓게 되니 아예 건물도 부수지 마시오”라고 충고했다. 또 일본군에게 박해중지를 요청하기도 했다.
안성지역에 만세운동이 전개되자 일본군이 군중을 진압하기 시작했다. 일본군에 쫓긴 군중은 공베르 신부가 있는 안성성당으로 몰려왔다. 그러자 공베르 신부는 성당 마당에 프랑스 국기를 게양했다. 공베르 신부는 일본군에게 성당 구역에 대해 치외법권을 주장하면서 국제분쟁의 위협을 들어 접근을 막아 독립운동에 참여한 이들을 보호했다.
당시 경성대목구장이었던 뮈텔 주교는 독립운동 참여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하고 있었다. 공베르 신부는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도왔지만, 대목구장의 뜻을 거스른 것이라기보다 인도주의적인 차원에서의 도움이었다.
공베르 신부는 만세운동 당시 뿐 아니라 한결같이 안성지역 사람들을 도왔다. 가난한 이들에게 음식을, 병자에게는 약을 나눴고, 성당 마당에 놀러온 어린이들에게는 자신이 재배한 포도를 나눠주며 어울리기도 했다. 또 가난한 농촌인 안성 지역 주민들을 자립시키기 위해 모국인 프랑스를 32차례나 오가며 포도 재배를 실험하고, 지역 주민들이 포도를 재배할 수 있도록 도왔다. 공베르 신부는 2012년 ‘안성을 빛낸 인물’로 선정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