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마당

[독자마당] 거룩한 성호경

서희(효주아녜스·안동교구 영주 가흥동본당)
입력일 2018-11-13 수정일 2018-11-14 발행일 2018-11-18 제 3120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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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인간극장’에 방영된, 이탈리아에서 온 김하종 신부님이 운영하는 무료 급식소 ‘안나의 집’ 사연을 보고 시를 써봤습니다.

그들은 제각기 경직된 몸으로

겨울 오후의 싸락눈을 맞으며

삼삼오오 긴 줄을 지으며 언덕을 올라갔다

가을무를 썰어 넣고 끓인, 딴에는

육개장이라고 쇠고기 몇 점과 기름치가 떠 있는 국밥을

바닥끝까지 긁어먹었다

식당 안은 어떤 이야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느리고 아득한 바닥을 긁는 소리뿐

그 소리는 마치

겨울바람이 늙은 아비의

옆구리를 파고드는 소리 같기도 하였다

한쪽에서는 폐지를 줍는 김씨가

성호를 긋고 있었다

경기도 성남시 안나의 집

육교가 올려다 보이던 을씨년스러운 삼층건물,

더 이상 내려갈 곳도 없는 낭떠러지 끝에서

국밥이 뿜어내는 김을 맡으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이 모습을 본 나는

국밥 속엔 예수가 없다는 주장을 할 수가 없었다

서로의 등에 따뜻한 손길이 필요한 겨울

갈곳 없는 그들은 똑같은 길을 걸어 내려간다

제각기 몸을 밑천으로 삼고

국밥마다 담겨져 있는 거룩한 성호를

내일 또 만나러 힘겨운 언덕길을 오를 것이다

서희(효주아녜스·안동교구 영주 가흥동본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