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밀알 하나] 성지순례 / 박상호 신부

박상호 신부 (어농성지 전담)
입력일 2018-10-30 수정일 2018-10-30 발행일 2018-11-04 제 3118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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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에 와서 처음으로 성수기(?)를 경험하고 있는 요즘입니다. 몰려오는 순례자들을 어떻게 하면 더 잘 맞이할 수 있을까 고민을 하며 준비를 합니다. 자라난 풀도 깎아 주고, 위험한 요소가 있으면 제거하고, 시야를 가리는 나뭇가지들을 전지합니다. 성물방의 성물들도 가득 채워놓고 성지 입구며 십자가의 길, 순교자 묘역을 청소하고 정리합니다.

그런데 많은 순례자들이 같은 목적으로 성지순례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같은 성지를 방문하더라도 그 동기와 목적이 서로 다른 몇몇 부류로 나뉘어지는 것이지요.

그 첫 번째 부류는 아픔에 대한 치유를 목적으로 성지를 찾는 이들입니다. 미사가 끝나고 성당 입구에서 순례자들에게 인사를 드리는데 할머니 한 분이 허리를 내밀며 말씀하셨습니다. ‘신부님, 허리가 너무 아픈데 기도 좀 해 주세요!’ 사제의 손이 닿으면 고통이 조금 줄어들 것이라 믿으며 말씀하시는 할머니의 얼굴이 근엄해 보였습니다. 저는 허리에 손을 대고 성령님께 할머니의 아픔을 치유해 달라고 기도드렸습니다. 암 투병으로 항암치료 때문에 모자를 벗지 못하고 기도를 청하는 신자도 있고, 큰 수술을 앞두고 어두움 가득한 얼굴로 안수기도를 청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부부간의 갈등으로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사람이 조용히 방문하여 기도를 드리다가 돌아갑니다. 고부간의 갈등으로 억울한 마음을 저에게 오랫동안 하소연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사춘기를 혹독하게 보내고 있는 자녀와의 갈등이 해소되지 않아 눈물 흘리며 고통을 호소하는 부모들, 자녀를 데리고 와서 면담 요청을 하며 눈물을 훔치는 부모들을 마주할 때면 제 마음도 무거워집니다.

성지를 찾는 두 번째 부류는 단체 순례자들입니다. 본당이나 봉사단체, 기도회 단체에서 계획한 성지순례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마치 가을 소풍을 온 것처럼 알록달록 화려한 복장을 하고 성지로 들어섭니다. 미사를 봉헌하고 점심식사를 하며 물 컵에 맑은 소주를 담아 마시는 어르신들도 있습니다. 이분들은 단체로 성물방에 가서 각자 마음에 드는 성물들을 구매합니다. 십자가의 길이나 묘역참배를 하고 마지막엔 꼭 단체사진을 찍습니다. ‘성~지~~!’를 크게 외치며 사진 찍는 단체 순례객들의 표정은 가을햇살처럼 밝습니다.

이따금 성지를 찾는 이들 중에는 도장을 찍으러 오는 분들이 있습니다. 성지순례 기념 도장을 찍기 위해 들어서는 순간 ‘스탬프 어디에 있어요?’라고 묻습니다. 위치를 알려드리면 스탬프를 찍고 다시 돌아서 발걸음을 옮깁니다. 다른 이들에게 나 그 성지 순례했어 라며 스탬프를 자랑할 모습을 상상하지만, 그래도 성지까지 직접 찾아온 것만으로도 대견스럽게 바라봐야 하겠지요?

동기와 목적이 어떻든 더 많은 분들이 성지를 찾고, 기도하고, 예수님을 느끼고 삶의 자리로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박상호 신부 (어농성지 전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