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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위 성인 약전] (83) 성 조화서 베드로 / 김옥희 수녀

김옥희 수녀ㆍ한국순교복자회ㆍ오륜대 순교자기념관장>
입력일 2018-02-27 수정일 2018-02-27 발행일 1985-07-07 제 1463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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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목을 치려는 회자수에게도 전교
성 조화서 베드로는 1814년 수원지방 도마지에서 태어났다. 그가 25세가 되던해 기해교난(1839년)이 일어나 그의 부친 조안드레아가 순교하자 그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충청도 신창에 이사하여 연명하였다. 조베드로는 한막달레나를 아내로 삼고 아들 조윤호 요셉(같은해 순교함)을 낳았다. 그는 순교자의 자손이며 신심 깊은 교우였기 때문에 당시의 선교사를 많이 도왔고 특히 최양업 신부의 복사겸 마부로서 기거를 같이하며 최신부를 모셨던 것이다. 최양업 신부가 별세한 뒤에 그는 1864년에 전라도 전주에 있는 교우촌인 성지동으로 가족들을 이끌고 들어가 살았다. 이곳으로 이사온 후 얼마안있어 아내 한막달레나가 죽었다. 아내를 잃자 그는 다시 새아내 김수산나를 맞이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가족과 함께 조용하게 신심생활에 몰두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려고 마음먹었던 것이다.

그는 본래 성격이 활기차고 명랑했으며 태도가 겸손하고 양순했기 때문에 그의 말은 다른 신자들도 대부분 신뢰하였다.

한편 그는 교우 본분을 충실하게 지켰으며 모범스런 신자가 되었다.

조베드로가 살고있는 마을은 타지방 교우들의 체포소식마저 못들을 정도로 첩첩산중의 깊은 교우촌이었다. 그런데 1866년 병인박해말기에는 깊은산중의 신자들을 모조리 색출하여 체포했다.

마침내 이곳 성지동에도 체포의 손길이 미치게 되었으니 12월 5일 저녁 조베드로가 아들 요셉을 데리고 이웃집들을 찾아보기 위해 집을 나서 같은교우 박씨네집에 막 다다를 무렵 갑자기 포졸들이 그의 집에 도착하였는데 조베드로는 자진하여 자기집에 들어가서 스스로 신앙을 고백하여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던 것이다.

이를 보고 있던 그의 며느리는 밖으로 달려 나가 아직도 들어오지 않고있는 자기 남편 윤요셉에게 사실을 알려 주었다. 이때 조베드로는 자기를 심문하는 포졸들에게 자신이 천주교의 참된 신자라는 것을 용기있게 말하고 자신이 배운 천주교의 진리는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자기부친한테서 직접 교리를 배웠다고 공공연하게 자백하는 한편 자신과 자기 아들 외에는 천주교 신봉자를 아무도 아는 바 없다고 확언하였다. 이때 그의 아들 조 요셉이 집으로 들어오자 아버지는 아들에게 속히 피하라고 여러가지로 타일렀으나 아들은 이를 완강히 거절하면서 이내 아버지 방으로 들어가 함께 체포되었다. 이렇게 하여 부자 함께 묶여 전주로 향하는 도중 여러가지로 수모와 혹심한 천대속에 주막에서 며칠을 묵어가며 목적지인 전주에 도착한 후 곧 이어 다른 교우들과 함께 심문을 받게 되었다.

조 베드로는 먼 길을 끌려 갈때 그의 아들에게 순교의 용덕을 마음깊이 일으켜 주려고 간곡한 말로 아들을 격려해 주었다.『요셉아! 결코 뜻을 굽히지 말아라 원님앞에 가서도 기어이 진리만을 대답해야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네 마음이 허약해져 넘어가서는 안된다』고 타일렀다. 그러면 또 아들이 아버지한테『종교적 신념을 버리지 마시라』고 당부하는 것이었다. 부자간에 오가던 말을 듣고 있던 외교인들마저도 이들의 굳은 신앙심에 놀라 경탄을 금지 못했다고 한다.

조 베드로는 감옥에 갇혀서도 함께있는 다른 교우들을 격려하면서 평온한 마음으로 순교에 임하도록 준비를 시켰다. 그뿐 아니라 그는 죽인다고 협박하며 배교를 강요하는 원님에게『내 비록 이 세상에서는 죽어 없어지더라도 죽은 뒤 내 곧 새 세상에 가서 살게 될 것이요』라고 응수하여 더욱 잔인한 고문을 당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교리서를 갖고있지 않다고 했기 때문에 또다른 고문을 혹독하게 당했지만 끝내 다른 교우의 고발이나 교리서의 근거지도 발설하지 않았다. 그와 같은 고문을 받은 얼마후 그가 곤장을 맞고있을때 옆의 안면있는 한 외교인을 불러 자기집에 있는 책들을 다른 곳에 좀 옮겨달라고 부탁했다. 며칠후 포졸들이 조베드로를 앞세우고 그의 집에 오자 그의 젊은 며느리가 우는 것을 보고『왜우느냐? 울 이유가 도대체 없지 않으냐? 나는 곧 천국으로 떠날 사람이다. 그러니 그리움을 그만두라』고 타이르기까지 하였다.

그후에도 계속 다른 교우들을 고발하라고 할때마다 조베드로는 전혀 아무도 모른다고 완강히 거절하곤하였다. 그는 또한 모진 감옥살이 중에서도 늘 동료 교우들에게 신앙을 배교치말라고 충고하는가 하면 그가 처형되는 날도『우리는 오늘 천국에 가고 있는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정바르톨로메오 문호에게는『우리가 받을 행복이란 결코 작은것이 아니지요. 우리는 충만하고 놀라운 은총을 받게 될 것입니다』라고 격려하였다. 그리고 자기 아들 감방을 지나칠때마다 천국에서 곧 함께 만날 것을 상기시키며 굳이 신앙을 지키고 배교하지말라 당부하기도 하였다. 사형장에 도착하자 조베드로는 침착하게 순교할 준비를 다 갖춘 다음 회자수(휘광이)한테 목을 내다주기에 앞서 십자성호를 정성껏 긋고나서『이곳 처형장에서까지도 흉폭한 그대여、천주교를 좀 믿어보시오. 우리는 죽으면서도 진리인 하느님을 신봉하지 않는가』라고 반복한 다음 다시한번 성호를 놓은 후 목을 내밀면서 장엄하게 세찬 칼을 세번받고 그의 머리는 땅에 떨어졌지만 결국 그는 영생의 길로 나아갔던 것이다.

때는 1866년 12월 13일、전주 숲정이에서 52세로 순교하였다.

김옥희 수녀ㆍ한국순교복자회ㆍ오륜대 순교자기념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