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레지오는 나의 모든 것 -「인꼴라마리애」문태준 단장의 활동 체험기] 13 보고서 작성

입력일 2017-08-03 수정일 2017-08-03 발행일 1994-10-02 제 1923호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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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꼴라」활동 도와준 은인께 감사

평신도 교육 시킬 자격 있나 “회의
■92년 4월 6일

인꼴라 마리애에 제출할 보고서를 작성하기로 종일토록 마음 먹었으나 손에 잡히지 않아 누워서 뒤척였다.

아틀랜틱시티의 저녁기도와 40일 기도에 참례하기 위해 갔다. 40일 기도 후「그리스도의 어머니」쁘레시디움 주회에 참관해 보니 14명의 단원 중 출석은 5명뿐이었다. 출석을 독려하기 위해 활동 사항을 배당하고 새로 입단한 단원들을 위해 레지오에 대한 개요를 설명하고 훈화를 했다.

내일은 결혼 29주년, 아내에게 축전이라도 보내야겠다.

■92년 4월 7일

아내와 통화하며「사랑의 계약」(?)을 새롭게 맺어 항상 따뜻한 사랑을 나누어가기로 약속했다. 옛날을 회상하며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내는 하느님께서 점지해 주신 나의 사람임을 다시 한 번 느꼈다.

『우리의 사랑아 영원하라』

■92년 4월 8일

92년 4월 8일 아침 9시경 나준국 회장께서 전화를 주셨다. 어젯밤에 내가 부활절 다음날쯤 돌아가겠다고 했더니 섭섭해 하시며 아내가 오면 식사라도 함께 하자고 하셨다. 나 회장을 만나 여러 이야기를 나누고 체리힐로 왔다. 최홍길 신부님이 돌아오시는 날이라 요셉피나 율리아나씨와 함께「뉴왁」공항으로 나갔다.『아이고 수고 무척 많으셨습니다』하고 인사드렸다. 시종 로스앤젤레스의 밸리성당과 그랜드캐년 이야기뿐이셨다.

앵커리지 꾸르실료 임원 의뢰 때 막바지에 LA 김준철씨의 연락이 없어 뉴욕에 있는 차충제씨와 순무씨의 협조를 받아 조규현씨와 박형전씨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 즉시 전화상으로나마 차충제씨와 손무씨에게 감사를 드렸었다.

지난 2월 19일 이인복 교수의 강의를 들으면서도 그러했고 이번 3월 28~29일 황경아씨의 강의를 들었을 때도 느꼈지만『나는 아직 멀었어. 본당 일은 많이 했다지만 강단에 서서 평신도 교육을 하기에는 아직 멀었어』라는 생각이 또 물밀듯이 밀려온다. 그저 이 시대에 목숨 바칠 순교의 기회가 있으면 과감히 바치겠다는 열의 하나로 뛰어든 것 뿐이었는데….

이 밤 정말 회의스럽고 서글프고 답답하다. 아내가 여기 오는 것 취소하고 알래스카고 라스베가스고 다 취소하고 조용히 은둔하여 공부나 하며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92년 4월 9일

『예수님! 당신이 세우신 교회에는 교계제도가 있지요.이를 세우신 목적은요? 분명 권위와 함께 겸손한 지도체계를 통하여 일사불란하게 이끌어 더욱 효과적인 복음 전파와 보람된 삶을 누리게 하여 위로는 당신 백성들로 하여금 사제에게 진정 우러나는 존경과 사랑의 관계를 맺고 이웃과는 더욱 일치하는 형제애를 나누는「사랑의 공동체」가 되게 하시려 함이 그 목적이 아니었는지요? 그러나 많은 이들이 이것 때문에 상처 받고 소외감을 느끼는 경우도 많은 것 같습니다. 찬란한 아침 햇살이 창가로 눈부시게 비쳐 들어오는 희망찬 새 아침에 이토록 서글픈 글을 써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이란 말입니까?』

인꼴라 마리애에 관한 보고서 작성을 끝내고 우송하였다. 그간 활동 사항이 너무 미약해 처음 계획했던 60개 항의 반도 채우지 못했다. 그러나 뜻을 두고 혼자 떠나와 고생하며 살았다는 데 보람을 두고자 했다.

어쨌든 그간 최 신부님의 크신 배려와 사랑에는 깊은 감사를 드릴 수밖에 없다. 한 사제와 이토록 허물없이 마음을 열고 사랑을 나누며 일해 보긴 처음이다. 또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정 요셉피나씨와 강 율리아나씨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신앙으로 열심히 살아가는 두 분께 항상 주님의 은총이 충만하시기를 기도드린다.

■92년 4월 10일

앵커리지의 꾸리아 단장인 강 헤레나씨로부터 전화가 왔다. 금주 금요일부터 남성 쁘레시디움을 시작하려 했다가 아무래도 내가 그곳에 도착한 후에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시작했다가 잘 안 되면 다시 모으기 힘드니 그냥 좀 더 기다리겠다며 꼭 와 달라 했다. 유진식 회장도 권 회장과 상의 후 나 신부님께 말씀드렸더니 공식적으로 환영한다며 곧 편지를 보내겠다고 말씀하셨다. 또 지난번 내가 그곳에 체류 중에 대세를 준 권태연씨에게 프랜시스T.훨리 대주교께서 손수 병자 봉성체를 하시어 성체를 영하게 해주었다는 놀라운 사실도 전해주었다. 레지오 단원들 훈화시는 요청하면 직접 해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했다. 그분은 평소 레지오에 별 관심이 없다고 알고 있었는데 지난 3월 3일 나와의 면담시 레지오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시고 조금 변화하신 것이 아닌가 내 나름대로 생각해 보았다.

참으로 기쁘고 반가운 일이었다.

■92년 4월 11일

앵커리지「여성 제1차 꾸르실료」를 위해 공문을 기안해서, 뉴욕대교구 사무국의 남해근 신부님 앞으로 협조 공문을 발송하라고 나진흠 신부께 팩스로 보내드렸다. 황기 관장님과 오랜만에 연락이 되었다. 황종철 사범은 도장을 개설하면 전폭적인 지원과 수련을 위한 비디오 테이프를 주겠다며 캐나다지구 무덕관의 개관을 원했다.

최 신부님이 LA의 울뜨레야에 자꾸만 동행을 원하셨다.「북미주 꾸르실료 협의회」창립 주역으로서도 그렇고 또 음악이 신통치 않을 터이니 같이 가자 하셨다. 내키지 않는다고 말씀드렸다.

아틀랜틱시티로 와 교구장을 초청하는 성 목요일 예절 때 부를「주교 영접가」를 비롯 많은 성가를 연습했다.

■92년 4월 12일

1992년도 사순절 막바지의 성주간을 맞았다. 아침 8시에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여 성지 가지를 손에 들고 전 신자가 성당 마당을 한 바퀴 돌고 성가를 부르는데 나는 색소폰 연주를 했다. 오랜만에 행진 중에 연주를 해보았다. 수난 복음 이후 계속 색소폰을 연주하며 미사에 참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