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레지오는 나의 모든 것 -「인꼴라마리애」문태준 단장의 활동 체험기] 14 1차 활동 마감

입력일 2017-07-27 수정일 2017-07-27 발행일 1994-10-16 제 1925호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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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준비에 마지막 정열 쏟아 

알래스카서는 “더욱 최선” 다짐
■92년 4월 13일

18일 밤에 모이기로 한 고향 김천의 고등학교 동창들이 묵을 호텔을 예약했다. 모두들 35년 만에 만나는 고향 친구들이었다. 객지에서「소동문회」를 갖는 셈이었다. 낮 12시경 가브리엘로부터 전화가 왔다. 아내가 떠났다 했다. 설레이는 마음으로 공항에 마중나갔다. 출구 옆에 숨어있다가 갑자기 아내 앞으로 나타나니 놀라며 내 품에 뛰어들었다. 그간「말없는 전쟁」의 후유증이 한꺼번에 봄 눈 녹듯이 다 사라져버렸다.

체리힐 사제관까지 그저 기쁘고 천진난만한 어린이처럼 재잘거리며 함께 달려갔다. 총각시절 아내와 만날 때의「두근거림」 바로 그것이었다. 3개월여 만에 만난 아내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밤 새도록 나누었다.

■92년 4월 14~17일

성삼일 준비로 무척이나 바빴다. 특히 무덤 제대 만드는 것은 모두가 처음이라 아내의 협조 덕분으로 그런 대로 잘 꾸며졌다. 부활성야의 성 베드로성당(미국인)과 합동미사 때 입당성가 응송 성체성가를 우리가 부르도록 계획되어 있어 그 연습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16일 성 목요일 밤에는 교구장님과 최 신부님이 공동으로 미사를 집전하셨다. 미사 후 무덤 제대 앞에서 모든 신자들은 성체조배를 드렸다. 열심하고 진지한 조배 동안 장궤틀에서 무릎을 꿇으시고 지켜보시던 교구장께서는 성체조배가 끝나자 우리 신자 한 사람 한 사람과 악수를 나누시고 격려해 주셨다.

세족례 때 유평수씨 등 11명의 발을 손수 씻겨주신 교구장님께 모두들 진심으로 감사를 드렸다.

성 금요일 오후에 아내와 함께 성체조배를 했다. 1년여 기간의 인꼴라마리애 단원으로서의 활동이 이번 부활주일을 지낸 후 1차 끝 마치게 된다. 그간 큰 실적도 없이 3개월을 보냈다는 생각이 들어 앞으로의 길을 밝혀주실 것을 기도드렸다. 성체조배 중에 윤석린 회장이 함께 조배하며 내게 많은 위로와 격려를 해주셨다.

■92년 4월 18일

오늘은 성 토요일 부활 성야. 미국인 신자들과 함께 성야미사를 장엄하고 경건하게 봉헌했다. 우리 성가대의 성가가 나의 색소폰 독주와 더불어 아주 좋았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어떤 미국인 노부부가 나한테 다가와『원더풀』하면서 일생에 이토록 멋있고 장엄한 미사 참례는 처음이라며 활짝 웃는 모습으로 악수를 청해오기도 했다.

그간 열심히 준비하고 연습한 보람이 있었다. 모처럼 만에 맞는 상쾌한 밤이었다.

미사 후 바로 저녁 9시에 모이기로 한 김천고등학교 동문들을 만나기 위해 아내와 함께 호텔로 달려갔다. 다섯 쌍 부부가 오기로 되어 있었는데 한 쌍이 못왔다. 35년 만에 만나는 친구들, 세월도 많이 흘렀지만 모두들 많이 늙어 있었다. 특히 나의 신앙활동에 관한 이야기가 주된 화제였다. 「그 못된 깡패(?)가 어떻게 선량해질 수 있었냐」「정말 불가사의」라는둥 여러 화기애애한 대화를 나누다가 새벽 4시쯤 되어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고 아파트로 돌아왔다. 모두들 내내 건강하기를 빈다.

■92년 4월 19일

「예수부활대축일」. 아틀랜틱시티 본당의 전 신자가 기쁨과 환희 속에 진정 새로 태어나는 부활절을 맞이하고자 매일 십자가의 길과 성체조배 저녁기도 삼종기도를 함께 바친 지 40일. 드디어 환한 얼굴로 부활대축일을 맞이했다.

최홍길 신부님께서 특별히 40일 간의 개근자에게 사랑을 듬뿍 담은 표창과 부상을 수여했다. 12명의 신자가 하루도 안 빠지고 주님의 고통에 동참해 이 상을 탔다.

이제 며칠 후면 철수한다는 마음이라 한편으로는 홀가분한 듯했으나 못다한 임무에 대한 죄책감으로 다소 무거운 마음도 들었다. 아틀랜틱시티를 인꼴라마리애 단원으로서의 활동에 적격지라고 생각했던 당초의 판단과 실재가 이토록 차이가 날 줄은 전혀 짐작을 못했었다.

어쨌든 이제 철수하면 다시 임무를 받고 알래스카로가 이번의 경험을 살려 좀 더 실질적인 활동을 전개해보려고 한다. 한계성을 느낄 때 제일 괴롭고 좌절한다.『주여 도와주소서』

■92년 4월 20~22일

이틀 동안 떠날 준비와 각 처에 대한 인사가 대략 끝났다. 모두들『왜 벌써 떠나세요. 1년 계획으로 오셨잖습니까』하며 아쉬워 한다. 이분들에게 일일이 죄 지은 사람처럼 용서 청하는 마음으로 석별의 인사를 나누었다.

무엇보다도 최 신부님께서는 아틀랜틱시티와 체리힐양본당의 이름으로「인꼴라마리애 패」까지 만드셔서 전해주시며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깊은 사랑과 배려에 눈시울이 뜨겁도록 감사하고 은혜에 대한 보답을 무엇으로 해드려야 할지 몸둘 바를 몰랐다.

22일 아침, 최 신부님 윤 회장 신용 사무장 등과 함께 아침식사를 하고 차에 올랐다. 최 신부님의 애석해 하시는 모습, 안스러워하시는 마음을 읽으며 손을 흔드는 모습이 안 보일 때까지 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하다가 보니 어느 새 차는 대로로 접어들었다.

아내와 함께 지나간 이야기들을 나누며 달렸으나 해가 저물어 하루 만에 다 갈 수 없다는 판단으로 도중에 호텔로 들어갔다.

■92년 4월 23일

아내와 아침기도를 바치고 출발해 나이아가라에 도착하니 오후 4시경. 드디어 캐나다 땅에 들어선 것이었다. 정말 오랜 만에 자식들이 있는 집을 향하여 힘차게 질주했다.

남자 아이들이지만 아버지 어머니 돌아오신다고 깨끗이 청소해놓고 밥까지 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감사기도 드리고 그간의 이야기들을 나누며 온 가족이 한데 모여 기쁨을 나누었다.

내용상으로는 불만뿐인「인꼴라마리애 단원의 제1차 보고문」이라 할 수 있는 기록을 남기면서 제 2차에는 좀 더 만전을 기할 것임을 다짐하고 주님께 송구스러운 마음으로 이 기록을 마감한다.

「주님, 대단히 죄송합니다. 알래스카에서는 더욱 최선을 다할 것을 다짐하오니 충만한 강복을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