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야곱 신부의 편지’는 국내에서 보기 드문 핀란드 작품이다. 아름다운 자작나무 숲을 배경으로 지극히 절제된 언어 사이에 조심스럽게 울리는 피아노 소리는 한 편의 기도 시 같고, 70여 분의 비교적 짧은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숲에서 온종일 피정을 한 듯한 여운을 남긴다.
영화는 살인죄로 종신형을 살던 레일라가 누군가의 도움으로 사면되어 출소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야곱 신부의 비서자리 외는 갈 곳이 없었던 그녀는 인적이 드문 시골의 낡은 사제관을 찾아간다. 이제 아무도 오지 않는 성당만 덩그러니 서있는 곳의 마지막 사제인 야곱 신부의 유일한 사목은 기도를 부탁하는 이들의 편지를 읽고 답장을 해주는 일이다. 신부의 눈이 보이지 않기에 그 일을 도와줄 사람이 필요했던 것인데, 세상과 신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 찬 레일라에게 기도를 청하는 사연을 읽거나 그들을 위로하는 신부의 영적 조언을 옮겨 써주는 일은 몹시 불편하고 못마땅하기만 하다.
편지가 뜸해진 어느 날 갑자기 야곱 신부는 혼인성사가 있다면서 그녀를 데리고 성당으로 가는데 결혼식 하객을 기다리던 레일라가 본 것은 노망이 든 신부 한 사람뿐이었다. 실망과 분노에 쌓인 그녀는 신부의 돈을 훔쳐서 그곳을 떠나려 하지만 더 이상 갈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폭풍이 몰아치는 성당에 홀로 남겨진 신부는 힘겹게 정신을 차리고 자기만의 봉헌제사를 거행한다.
죽음과도 같은 절망과 비참의 순간을 통과한 그들 앞에 여전히 쌓여있는 편지더미에서 야곱 신부는 이렇게 고백한다. “이 모든 편지들… 난 이 일을 하느님을 위해 하는 거라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 반대였나 봐요. 나 자신을 위한 일이었나 봅니다. 나를 지탱하게 하려는 주님의 방법이었던 거죠.”
이 대목은 특별히 하느님의 일에 봉사하는 이들에게 깊은 묵상거리를 제공하는 것 같다. 마치 우리가 행하는 봉사나 자선이 마치 하느님을 위한 일인 양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선한 일을 한다는 명분으로 자신의 이기심을 채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나는 어떤 일이 잘 안 풀려서 속상하거나 무언가를 더 잘했다는 생각에 우쭐해질 때 야곱 신부가 앉아있던 자작나무 숲의 바람과 햇살을 기억한다.
편지들이 귀찮아서 버리기까지 했던 레일라의 가장 깊은 상처와 수치심이 결국 그 편지들을 통해 치유되고 구원되는 장면은 몇 번을 보아도 가슴이 먹먹해진다. 한 장면, 한 장면 곱씹어 볼수록 하느님의 섭리와 구원의 신비를 이토록 잘 표현해낼 수 있을까 하는 경외감이 드는 작품이다.
김경희 수녀는 철학과 미디어교육을 전공, 인천가톨릭대와 수원가톨릭대 등에서 매스컴을 강의했고, 대중매체의 사목적 활용방안을 연구 기획한다. 가톨릭영화제 프로그래머이며 현재 광주 바오로딸미디어 책임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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