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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 날 특집] 기고 / 우리 시대의 스승

권길중(한국평협 회장·전직 고등학교 교장)
입력일 2015-05-06 수정일 2015-05-06 발행일 2015-05-10 제 2943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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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어려움에 ‘귀가 크게 열린 선생님’
선생은 많지만 스승은 없는 시대
학생에 대한 세심한 관심·사랑이
잊을 수 없는 진정한 스승 만들어
방과 후 조용한 시간에 빈 교실을 돌아보다가 어느 고3 교실 뒤 게시판에 큼지막하게 적혀 있는 글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교실 환경정리를 한다고 게시판에 적어놓은 그 글은 ‘선생님은 많다. 그러나 스승은 없다’라고 적혀 있었다.

그 글을 읽은 뒤 교실 순시를 계속할 수 없어 교장실로 돌아오면서 깊이 생각해 보았다. ‘정말 오늘을 사는 세대들에게 스승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

누군가가 장난 삼아 보낸 글 중에 인생은 B(Birth-탄생)와 D(Dead-죽음) 사이 끊임없는 C(Choice)의 연속이라고 한 글이 있다. 그러나 우리 인생에는 스스로 선택할 수 없으면서도 삶의 질, 그리고 참과 거짓을 결정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주는 대상이 존재한다. 바로 부모, 형제 등 가족과 교사 같이 자유의지로 선택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그래서 부모와 교사의 책무는 더욱 중요한 것이다.

지난번 한 매체에 기고한 글에서 학생들의 개인적 격차를 결정하는 요소로 ‘선수학습의 결손 정도’, ‘정의적 출발점 행동의 수준’ 그리고 ‘수업의 질’이라는 가네(Gange)의 이론을 소개한 적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세 번째 조건인 ‘수업의 질’은 교사의 노력과 학생에 대한 사랑의 수준이 결정해주는 부분이 될 것이다.

교사 중 수업기술이 뛰어난 분 가운데 수업시간의 목적을 수행하는 것으로 임무를 다했다고 생각하여 학생의 개인적 어려움은 모른 척하고 지나가는 분들을 볼 수 있다. 그 선생님은 학생들이 지난 시간에 달성해야 할 수업의 목표를 놓친 ‘선수학습의 결손’에 대해서는 별로 걱정하지 않을 수도 있다.

만약 그 선생님이 학생들의 학습동기를 고려하지 않았고, 수업을 따라가지 못해서 고민하는 학생들에 대해 배려하지 않았으며, 학급 친구들과의 관계 같은 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채, 자신이 준비해온 교안에만 충실하게 수업을 마쳤다면 두 번째 조건인 ‘정의적 출발점 행동’ 역시 무시했기 때문에 학생들의 학습력 향상에는 큰 도움을 줄 수 없었을 것이다. 그 교실의 게시판에 적혀있는 ‘교사는 많다’는 말이 주는 의미가 이런 선생님들에 대한 표현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면 우리 시대의 스승은 누구일까? 귀가 크게 열린 선생님, 그래서 학생의 어려움에 대한 투정(?)을 끝까지 들어주는 선생님이 계시다면 그분이 바로 우리 시대의 스승이 아닐까 생각한다. 학습부분에서 학급전체 평균이나 석차를 따지고 고민하기보다 개별학생의 문제에 더 큰 관심을 갖고 계신 분이다.

한 학생이 자기 교과를 따라오지 못해서 어려워하면 언제부터 성적이 하락하기 시작했는지를 살피고, 그 하락이 지속적인지, 일시적인지, 급격한 현상인지, 서서히 진행되는 것인지 등을 세세히 살펴 준다면 그 학생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스승을 만나게 된 것이다.

교사의 열린 귀는 학생의 생활에도 관심을 보여야 한다. 학생 스스로가 자신의 문제를 들고 선생님을 찾는 경우는 흔치 않다. 교사의 학생에 대한 애정과 세심한 관찰에 의해서만 문제에 접근이 가능한 것이다.

주로 학생들 대부분이 좋아하고 흥분하는 학교행사 때나 학급에 경사가 있을 때 다른 학생들과 함께 좋아하지 못하고 홀로 있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그의 말문을 열 수 있게 된다면 그 교사는 한 학생의 가슴 속에 평생 생명의 은인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전에 한국교육개발원에서 ‘어떤 선생님을 존경하는가’를 설문조사한 적이 있다. 그 결과 자신이 교육자라는 신념을 가진 교사(32.5%)와 함께 학생에 대해 깊은 관심과 사랑을 지닌 교사(32.5%)를 가장 존경한다는 응답이 많았다. 요령 있게 수업하는 교사나 실력 있는 교사 등은 5.5%와 5.1%밖에 선택하지 않은 것을 보면 지금 누가 우리의 스승인가를 짐작하게 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대만의 교육과정에는 ‘교사는 모름지기 낙업(樂業)하고 경업(敬業)하며 근업(勤業)해야 한다’고 적시하고 있다. 교사가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지 못하면 교사가 아니며, 교사직이 자랑스럽지 않다면 교사가 아니고, 부지런히 학생을 돌보지 않는다면 이미 교사일 수 없다는 근엄하기까지 한 경고라고 할 수 있다.

이 시대의 모든 선생님들은 우리의 스승은 오직 한 분뿐이라는 겸손한 자세로 학생 한 사람이 곧 전체임을 인식하고, 소중하게 모시는 목자가 되어 평생 잊지 못할 스승이 되시기를 기도하며 올해 ‘스승의 날’을 맞고 싶다.

권길중(한국평협 회장·전직 고등학교 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