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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해 · 창간 86주년 기획 - 현대 가톨릭 신학의 흐름] (31) 죽음과 종말에 관한 묵상 ③ :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며

박준양 신부(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의신학 교수)
입력일 2013-11-12 수정일 2013-11-12 발행일 2013-11-17 제 2870호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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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 심판’은 하느님 사랑 실현되는 종말론적 완성
악행 일삼는 자들에게는 두려운 순간이지만
주님 믿는 이들에게는 정의·은총 이뤄지는 자리
인간에 의해 깨어진 조화가 새롭게 복원되는 기회
종말론적 희망은 고난·죽음 공포 뛰어넘는 격려
보통 ‘종말’이라고 말하면 두려움이 먼저 앞서게 된다. 마치 절벽을 향해 질주하던 자동차가 끝내 추락해버리고 마는 것 같은 파국과 파멸 개념으로 ‘종말’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종말에 관한 신학적 성찰’, 즉 ‘종말론’의 목적은 두려움과 공포를 자아내는 데에 있지 않다.

종말론의 핵심은 인류와 세상의 완성에 대한 희망적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일부 무신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현재의 어려움을 잊고 외면하게 만드는 일종의 ‘아편’과도 같은 기만적 환상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지금 우리가 체험하는 인간의 한계와 죽음을 극복할 수 있게 하는 진정한 희망에 관한 메시지이다. 하느님만이 이루실 수 있는 놀라운 역사(役事)에 대한 희망, 그래서 인류의 역사(歷史)가 결정적이고 최종적으로 완성되는 미래에 대한 아름다운 희망을 전하고자 하는 것이다.

최후의 심판

우리가 기다리는 종말론적 완성이란 우리를 죽음에서 구해내는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생명의 충만함을 체험하는 순간이다. 따라서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은, 우리의 생명이 현재의 양적 시간 개념 안에서 무한정 연장되는 상태로 지속됨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느님의 위대한 사랑 안에서 우리의 생명이 충만함에 도달하여 온전히 실현될 것이라는 질적인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즉,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모든 한계 체험이 하느님의 사랑에 의해 극복되고 우리의 생명이 참으로 충만하게 꽃을 피우는 온전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종말론적인 심판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한편으로, 심판은 우리 지상 생활의 모든 죄와 잘못을 밝히고 벌하시는 하느님의 정의가 온전히 이루어지는 상태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심판은 회개하는 우리를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을 체험하고 구원을 얻게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는 우리에게 두려움인 동시에 희망으로 다가오는 결정적 사건이다.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재위 2005~2013)

는 2007년의 회칙 ‘희망으로 구원된 우리’에서 이 문제에 대하여 말한다.

“하느님의 심판은 정의이며 또한 은총이기 때문에 희망입니다. 심판이 은총이기만 하다면, 그래서 이 세상에서의 모든 일을 무의미하게 만든다면, 우리는 역사와 하느님께 정의라는 중요한 문제를 묻고 하느님께서는 이 문제에 대하여 우리에게 설명하셔야 할 것입니다. 심판이 정의이기만 하다면, 심판은 결국 우리에게 두려움만 가져다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강생은 심판과 은총을 매우 긴밀하게 연결시켜 정의가 확실히 세워지도록 하였습니다.”(47항)

따라서 최후의 심판이 이 세상에서 악행을 일삼는 자들에게는 큰 두려움의 대상이 되겠지만,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체험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참으로 희망의 대상이 된다. 최후의 심판이란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이 온 세상 안에서 충만하게 실현되는 종말론적 완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의 의미를 비로소 깨닫게 될 것이며, 모든 것이 본래적인 제 자리를 찾게 되는 위대한 순간이다. 그것은 우리가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고 하느님을 만나는 순간이며, 그래서 모든 것을 깨달아 알게 되는 ‘지복직관’의 상태인 것이다(1코린 13,12 참조).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최후의 심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역사 전체에 대한 당신의 결정적인 말씀을 선포하실 것이다. 우리는 창조 업적의 궁극적 의미와 구원 경륜 전체를 이해하게 될 것이며, 모든 것을 그 궁극적 목적으로 이끄시는 당신 섭리의 놀라운 길들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최후의 심판은 사람들이 저지른 모든 불의에 대하여 하느님의 정의가 승리한다는 사실을 드러낼 것이며, 당신의 사랑이 죽음보다 강하다는 것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1040항)

성경에서는 최후의 심판을 통한 종말론적 완성에 대하여 “의로움이 깃든 새 하늘과 새 땅”(2베드 3,13)이라고 표현한다.

이사야 예언서는 이러한 순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보라, 나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라. 예전의 것들은 이제 기억되지도 않고 마음에 떠오르지도 않으리라. 그러니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을 대대로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움’으로, 그 백성을 ‘기쁨’으로 창조하리라.”(65,17-18)

이는 또한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한데 모으는 계획”(에페 1,10)의 결정적이며 최종적인 실현을 의미한다.

요한 묵시록은 다음과 같이 그 결정적 순간을 묘사한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21,3-4)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1965)의 ‘사목 헌장’은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이 이 세상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지는 종말론적 완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는 땅과 인류가 완성되는 때를 모르며, 우주 변혁의 방법도 알지 못한다. 죄로 이지러진 이 세상의 모습은 반드시 사라진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정의가 깃들이는 새로운 집과 새로운 땅을 마련하시리라는 가르침을 우리는 받고 있다. 그 행복은 인간의 마음 속에서 솟아오르는 평화의 모든 열망을 채우고 또 넘칠 것이다. 그 때에 죽음은 패배하고 하느님의 자녀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할 것이며, 허약하고 썩을 몸에 심겨진 것이 불멸의 옷을 입을 것이다.”(39항)

로마 바티칸 시스티나성당의 ‘최후의 심판’(미켈란젤로 작, 13.7×12.2m). 최후의 심판이란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이 온 세상 안에서 충만하게 실현되는 종말론적 완성을 의미하기에,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체험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참으로 희망의 대상이 된다.

파루시아의 희망

신약 성경에서는 최후의 심판을 통한 종말론적 완성을 ‘파루시아’, 즉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다시 오심’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한다(참조 : 마태 24,3.27.37.39 1코린 15,23 1테살 2,19 3,13 4,15 5,23 2테살 2,1).

본래 그리스어 ‘파루시아’는 도착, 방문 등을 의미하는 말로서, 새로 즉위한 왕이 장엄하게 순시하는 것을 가리킨다. 성경은 이 단어를 사용하여 가장 위대한 임금이신 그리스도께서 장엄하게 당신의 모습과 현존을 드러내심을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 용어는 주님께서 첫 번째로 겸손하게 오신 것과는 달리 장차 영광스럽게 오심을 가리키며, 신학적으로는 하느님의 나라가 역사 안에 충만하게 실현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 임금으로서 오신다는 것은 곧 그분의 다스림이 온전히 이루어짐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파루시아’란 예수님께서 그 도래와 현존을 선포하셨던 ‘하느님의 나라’가, 이제 그리스도께서 우주의 통치자이자 심판자로서 영광 중에 다시 오심을 통해 드디어 완성될 것임을 의미한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께서는 “나는 알파이며 오메가이고 처음이며 마지막이고 시작이며 마침이다”(묵시 22,13)고 말씀하신다. 이는 바로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권세와 모든 권력과 권능을 파멸시키고 나서 나라를 하느님 아버지께 넘겨 드리실 것”(1코린 15,24)을 뜻하며, 또한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 것(1코린 15,28)”이라는 최종적 완성을 의미한다.

최후의 심판을 통한 종말, 즉 ‘파루시아’는 인간의 사악함과 잔악함이 모두 사라지고 하느님의 정의가 실현되어 하느님 뜻에 맞는 아름다운 화해와 상생이 이루어지는 새로운 세상이 실현됨을 의미한다. 이는 인간의 교만과 범죄로 인해서 그 조화가 깨어졌던 만물이 하느님의 정의로운 질서에 의해서 새롭게 복원되는(사도 3,21 참조) 위대한 순간을 가리킨다. 온 인류와 세상이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새롭게 될 것이라는 희망이 구체적이고 결정적으로 실현되는 때가 바로 ‘파루시아’인 것이다.

비록 우리는 아직도 이 세상에서 많은 한계 체험을 하며 살아가지만, 언젠가는 하느님께서 이 모든 것을 극복해주시고 우리 생명의 참다운 의미를 충만함 속에 실현시켜주실 것임을 믿고 희망한다. 바로 이러한 종말론적 완성을 희망하고 기다리면서 우리는 오늘을 살아간다. 이러한 종말론적 희망은 언제나 우리를 지탱시켜줄 것이며, 이 세상의 어떠한 어려움도, 마침내 죽음의 공포마저도 뛰어넘을 수 있도록 우리를 격려하고 인도할 것이다. 사랑 자체이시며 평화와 정의로 충만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이렇듯 간절한 희망을 결코 저버리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주요 참고문헌 : 박준양, 「종말론, 영원한 생명을 향하여」, 생활성서사, 22011, 8~9. 124~143쪽의 내용을 발췌하여 수정, 보완함.

박준양 신부는 1992년 사제로 서품, 로마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교에서 교의신학 전공으로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신학과 사상학회 편집위원장 및 주교회의 신앙교리위원회 위원, FABC 신학위원회 전문신학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박준양 신부(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의신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