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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지도 (7) 광주대교구 신앙의 요람 목포

김진영 기자
입력일 2013-10-29 수정일 2013-10-29 발행일 2013-11-03 제 2868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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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근대역사 속 전남지역 선교 뿌리의 자취가 …

20세기 초·중반 전남 모교회 역사 고스란히 간직
6·25 중 죽음으로 사목지 지켜낸 사제들 ‘믿음’ 절절
한국 최초 레지오 마리애 도입 전파 흔적도 역력
■ 여정 / 목포역→경동성당→유달산→북교동성당→산정동성당→연동성당

지금은 전라남도에서조차 인구수에서 여수와 순천에 밀려났지만 1930~40년대 목포는 인천, 부산과 함께 3대 항구·6대 도시 중 하나였다. 또한 전남 교우의 1/4이 있었고, 전남의 모든 교회들이 목포 본당과 연결이 돼 있었다. 1934년 5월 10일 전남 감목 대리구가 설정되고 골롬반회의 맥폴린 신부가 감목 대리로 임명됐을 때, 맥폴린 신부가 전남의 도청 소재지가 광주였음에도 불구하고 목포에 골롬반회의 한국 본부를 둔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이번에 ‘가톨릭지도’를 펼치고 함께 걸어볼 장소는 바로 ‘목포’, 20세기 초부터 중반에 이르는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공간을 걸으러 떠나보자.

■ 근대유산이 살아있는 거리

호남선의 끝자락에 위치한 목포역에 도착하자. ‘호남선종착역’이라는 글귀가 새겨진 비석이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아담한 크기의 역사지만 지난 5월 15일 개청 100주년을 맞은 유서 깊은 장소인 목포역은 충남과 호남지역 곡창지대에서 생산된 곡물들과 서해안 부두에서 올라온 수산물들을 일본으로 옮기고자 만들어진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추수의 기쁨을 누리지도 못한 채 곡식들을 빼앗기던 농부들의 아픔을 생각해보며 경동성당으로 향해보자. ‘민어의 거리’라는 독특한 이름의 거리를 지나 경동성당으로 가는 1km 남짓한 거리에는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건축물들을 볼 수 있다. 특히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 지점이었던 ‘목포근대역사관’은 꼭 들러볼 만하다. 다만 일제의 가혹한 수탈과 함께 독립군의 잔혹한 처형 사진들도 있으니 관람에 주의가 필요하다.

경동성당에 도착하면 왼편에 있는 ‘레지오 마리애 도입기념비’가 먼저 눈에 띈다. 그 옆으로는 성모상과 작은 뜰이 마련돼 있는데, 그 뜰에 서있으니 마음 한쪽에 쌓인 피로가 말끔히 풀리는 느낌을 경험해볼 수 있었다. 성당 안에는 61주년을 맞아 게시판에 사진을 전시해 놓았는데, 흑백사진들과 함께 적혀있는 글들을 보면 어느새 미소 짓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광주대교구 경동성당 안에 전시된 사진들에서 세월의 흔적과 선교 발자취 등을 찾아볼 수 있다.

■ 유달산 산자락

경동성당을 나와 유달산으로 향해보자. 구목포일본영사관을 지나 노적봉에 오르면 이순신 장군 동상을 만날 수 있는데, 이곳 노적봉이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군량미를 쌓아둔 것처럼 가장해 적을 속인 곳으로 알려진 장소이기 때문이다.

유달산에서 해질녘에 보는 붉게 물든 다도해는 통영과 함께 최고의 경치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절경을 뒤로한 채 유달로를 따라 산의 경치와 도시의 풍경을 번갈아가며 감상하는 재미를 느끼며 걷다보면 목포시사와 달성공원, 국제조각공원 등 풍성한 볼거리도 만나게 된다.

조각공원 입구에서 시내로 내려가는 북교길을 따라 걸으면 예쁜 성당에 이르게 된다. 뒤로는 유달산이 굳건히 서있고, 앞으로는 아이들이 뛰어 놀기에 좋은 마당을 가진 이곳이 광주대교구장 김희중 대주교가 어린 시절 뛰어놀았던 북교동성당이다. 성당 마당 한쪽에 있는 그네를 타며 세상 근심 없이 마당에서 뛰노는 아이들을 보니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

유달산 자락에 위치한 북교동성당.
시인들의 단순한 모임을 넘어 망국의 한과 우국충정을 토로하던 장소이다.
유달산국제조각공원

■ 선교의 뿌리를 찾아서

북교동성당에서 목포여자고등학교를 지나 산정동성당을 향해 가다보면 가장 먼저 예수성심상의 환영이 기다리고 있다. 두 팔 벌려 축복을 내려주시는 모습의 예수성심상을 쫓아 살짝 가파른 언덕을 오르면 산정동성당이다.

앞서 들린 경동성당과 함께 1953년 3월 31일 한국교회 최초로 레지오 마리애를 도입한 산정동본당은 전남 교회의 모교회로서 전라남도 모든 지역의 복음화에 힘써왔다. 목포선교 100주년·한국 레지오 마리애 기념관에서 그 발자취를 확인해 볼 수 있다.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몇몇 방문객들이 기념관을 둘러보자 사무장이 나와 해설을 해준다.

산정동성당 앞에는 6·25 전쟁 중 미 대사관의 피란 권고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의 사목을 위해 자리를 지키다 끌려가 대전에서 총살당한 사제들을 기억하는 기념비가 세워져있다. 김희중 대주교는 이들을 가리켜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양들을 찾아다닌 참다운 목자”라며 “희생된 사제들이 보여준 ‘믿음’과 ‘실천’이 광주대교구가 발전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라 평한 바 있다.

산정동성당에서 공사 중인 성미카엘대성당 부지를 따라 돌다보면 옛 교구청 자리에 도착하게 된다. 지금은 한가롭게 햇살을 즐기며 느긋하게 목포시를 바라보고 있지만, 이곳은 한때 목포 지역과 인근 섬 지방의 환자들을 치료해주며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면서 ‘빛’의 역할을 수행하던 이들이 머물던 장소였다. 그래서일까? 유난히 햇볕이 따사롭게 느껴졌다.

광주대교구 산정동성당에 있는 예수성심상이 목포시내를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축복을 내리는 듯 하다.
광주대교구 산정동본당에 위치한 한국 레지오 마리애 기념관에는 평일에도 신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 시련은 있어도

골목길을 가로질러 도착한 연동성당은 멀리에서 봐도 참 예쁘다는 것이 느껴지는 성당이었다. 그러나 불과 6년 전 2007년 1월 1일 이곳은 화마에 휩싸여 시커멓게 타버린 잔해만 남은 장소였다. 불길에 감실조차 타버렸지만, 바닥에 뒹굴고 있던 성합과 성체는 기적적으로 온전했고 이에 신자들은 평소와 다름없이 미사를 봉헌할 수 있었다. 오히려 화재 이후로 미사 참례자 수는 2배로 늘었다.

연동성당 오른쪽에는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1테살 5,16-18)라는 말씀이 새겨진 비석이 서있다. 화재를 겪고 난 이후의 본당 신자들의 마음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한 구절이 있을까.

목포역에서 경동·북교동·산정동·연동본당에 이르는 길은 5km정도 되는 짧다면 짧은 여정이지만, 이곳에서 신앙의 삶을 살다간 우리 선조들을 발자취를 따라가 보는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광주대교구 연동성당 오른편에 위치한 비석의 성구가 2007년 화재의 참상을 이겨낸 신자들의 마음을 대변해주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김진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