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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명순 례지 특선] 21 경기도 이천 어농리ㆍ단내

박영호 기자
입력일 2012-09-07 수정일 2012-09-07 발행일 1995-12-03 제 1981호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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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판 감싼 듯 아늑한 구릉들의 정겨움
어농리 - 성직자 영입운동 주역 윤유일 안장
단내 - 이승훈 영세 이전에 형성된 교우촌
가톨릭신문과 함께 떠나는 성지순례
여주와 함께 찰지고 기름진 쌀로 유명한 경기도 이천군 너른 들 가운데 위치한 어농리와 단내성지는 성지를 찾아 나선 길에서 만나는 너른 들과 그 들을 싸안은 듯 부드러운 곡선으로 흐르는 야트막한 구릉들이 정겨운 느낌을 준다.

이천은 우선 중부와 영동고속도로가 만나는 지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 서울이나 대전, 원주등지에서도 쉽게 찾아올 수 있지만 승용차가 아닌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는 조금 번거로운 것이 흠이라면 흠이다.

성지가 있는 마을까지 가는 버스 편은 하루 서너 번에 그쳐 시간이 안 맞으면 두세 시간을 논두렁에 주저앉아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택시기사들이 성지 위치를 잘 알고 있으므로 일정이 바쁘면 택시를 이용하는 것이 좋을 듯하고 그럴 경우 이천본당에 문의해 가톨릭운전기사사도회 소속 기사를 찾아 자세한 안내를 받는다면 더욱 좋다. 어농리성지와 단내성지는 지름길을 통하면 채 6Km 남짓의 거리 박에 안 되므로 두 성지를 한데 묶어 순례하는 코스가 괜찮을 듯하다.

어농리성지에는 한국교회에 최초로 성직자를 영입해 오기 위해 중국을 세번이나 왕래한 윤유일 바오로와 그 일가족의 묘가 모셔져 있다.

윤유일을 포함한 파평 윤씨 온 가족이 박해의 서슬 아래 희생된 후 2백여 년 동안 그 후손들은 뿔뿔이 흩어져 족보도 없고, 또 교회 안에서는 그 후손이 전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다가 1987년에 이르러서야 후손중 하나인 윤필용씨가 나타났고 그의 증언에 의해 이곳 선산안에서 윤바오로의 조부 사혁과 부친 윤장, 그의 동생 윤유오 야고보의 묘를 확인했다.

이에 따라 윤유일과 숙부 윤현, 윤관수와 그 사촌 누이동생 점혜 아가다와 운혜 루시아, 그리고 한국에 들어온 최초의 외국인 신부 주문모 신부의 의묘를 만들었고 그해 9월 15일 수원교구장 김남수 주교가 축성, 성역화됐다.

한국 교회사안에서 순교자 윤유일이 갖는 중요한 의미는 그가 바로 한국교회 최초로 성직자를 모셔 명실공히 교회의 모습을 갖추는데 기여했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윤유일은 초기 한국교회 지도자들에 의해 1789년 10월 예비자로서 북경의 북당에 파견, 바오로라는 세례명으로 영세와 견진을 받았으며 1790년 9월 재차 북경에 파견돼 성사를 집행할 신부를 보내달라는 간청을 했으며 1794년 말 윤유일은 지황(池璜)과 함께 국경으로 길을 떠나 마침내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신부를 서울로 영입하는데 성공했다.

목자가 없던 한국교회에 첫 사제로 발을 디딘 주신부는 서울 북촌(北村: 지금의 계동) 최인길(崔仁吉)의 집에 머물렀고 처음 6개월간은 아무 어려움 없이 성직을 수행했다. 그러나 신입교우인 한영익(韓永益)의 밀고로 주신부는 몸을 피해야 했고 윤유일, 지황, 최인길 세 사람은 체포돼 비밀리에 그날로 참수되어 순교했다. 그날이 1795년 6월 28일, 윤유일의 나이 36세였다.

단천리 성지, 혹은 단내 성지에는 1866년 병인박해때 당시 광주 유수부인 남한산성에서 순교한 정은 바오로(1804~1866)의 고향이자 유해가 묻혀있는 묘소이다. 단천리는 한국에 교회가 세워지던 1784년 이전부터 천주교가 들어와 있었던 유서 깊은 교우촌이기도 하다.

영동고속도로에서 덕평 톨게이트로 빠져나와 양쪽으로 시골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논밭길을 7킬로미터 정도 달리면 왼편 언덕위로 커다란 하얀 십자가가 보이고 그 아래 말끔하게 단장된 정은 바오로의 묘직 눈에 띈다.

성지가 말끔하게 모습을 갖춘 것은 1987년 9월15일 이천지역 출신의 순교자들을 기리기 위해 발족된 「이천성지개발위원회」는 수원교구장 김남수 주교의 집전으로 어농리 성지와 함께 이곳단내 성지를 축성함으로써 오늘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동래 정씨인 정은 바오로가 태어나기도 전에 그의 사촌형인 정섭과 정옥이 신앙을 갖고 있었으며 순교의 모범을 보여준바 있다. 신유박해가 지나간 3년 후인 1804년에 태어난 정은 바오로 역시 천주교에 입교하고 그 어머니 허데레사와 부인 홍마리아 역시 입교했다.

그들이 살던 이 마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동산밑 마을」은 1백3위 순교성인중 한사람인 이문우 요한의 고향이기도 하다.

또 단천리는 최초의 방인 신부인 성 김대건 신부가 머물렀던 은이마을과는 12킬로미터 남짓 떨어진 곳이기도 하다. 김신부는 1846년 귀국한 이후 동산밑 마을을 들러 이곳을 방문, 신자들의 고해성사를 집전한 후 바로 이 묘소앞 오방이산 모퉁이를 지나 배매실공소를 거쳐 새벽 어스름에 은이공소로 돌아갔다고 한다.

1866년 병인박해의 회오리는 이 마을에도 휘몰아쳤고 포졸들은 정은을 붙잡기 위해 매봉에 숨어 망을 보았고 당시 63세의 노인이었던 그는 추운 겨울날 낮이면 마을 뒤 「검은 바위」밑 굴속에 숨어 있다가 밤이면 내려와 잠을 자고 또 올라갔다. 그러나 결국 그는 포졸들에게 체포됐고 남한산성까지 가파른 산길로 끌려갔다. 한 달 여름 남한산성에 갇혀 배교를 강요당했으나 이에 굴하지 않은 그는 그해 음력 12월 8일 백지사형으로 순교의 영광을 얻었다.

박영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