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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오 신부의 사랑의 둥지 행복의 열쇠 (56) 송영오 신부의 가정이야기 ⑤ 어머니의 소원

송영오 신부 (수원교구 가정사목연구소 소장)
입력일 2012-09-04 수정일 2012-09-04 발행일 2012-09-09 제 2811호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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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찡하게 울리는 ‘강한’ 그 말, 어머니
우리가 늘 갈 수 있는 곳, 우리가 없으면 우리를 그리워하는 곳, 우리가 죽으면 슬퍼해주는 곳, 바로 우리의 가정입니다.

어머니! 어머니! 우리나라 사람들이 쓰는 말중에 가장 정겹고 슬픔이 묻어나는 단어가 바로‘어머니’라고 한다. ‘어머니’ 하면 왠지 모르게 서글픈 애환(哀歡)과 그리운 정이 솟아나고,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그것은 어쩌면 외세의 침략 속에서 늘 가족들을 돌보는 일은 어머니들이 도맡아 해 왔던 것에 이유가 있고 민족상잔의 비극인 6·25 동란의 아픔이 더욱 우리 어머니들의 삶을 고단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전쟁 중에 하늘 같은 남편은 세상 떠나보내고 대여섯의 어린 자식들을 홀로 길러 내야 하는 어머니들은 누구보다 억척스러워야 했고 당신들은 못 먹고 못 배웠어도 자식들만은 먹이시고 입히시며 가르치시어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드셨으니 정말 장하신 우리의 어머니들이시다.

고향 장호원에 가면 그릇가게에서 아버지를 도와 물건을 파시던 어머니가 계시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새벽같이 일어나 가게 문을 열고 장사할 준비를 하시는 어머니는 처음에는 손님들에게 말도 건네지 못하실 정도로 수줍음을 많이 타셨다고 한다. 그런 어머니가 일을 잘 벌이시는 아버지를 만나 가게뿐 아니라 고물상 엿장수들 아침밥 준비부터 시작해서 창고 정리, 가게 물건 진열 등 모든 것을 도맡아 하셨고 총회장이라고 하루종일 성당 가서 사시는 아버지를 대신해 집안의 억척스럽고도 고단한 일을 다하셨다.

남자들도 다루기 쉽지 않은 고무 대야부터 겨울철 차가운 양은 솥단지까지 직접 손으로 빼고 옮기면서 어머니의 손은 거칠고 엉망이 되셨다.

거기다가 4남매를 키워내시느라 고생이 많으셨고 나의 기억으로는 중학교 때까지 육성회비와 용돈도 모두 어머니께서 챙겨 주셨다. 늦둥이로 태어난 내 동생은 성당일로 바쁜 아버지 얼굴 한 번 제대로 본 적이 없었고 집안의 대소사는 거의 어머니가 처리하셨다.

5일마다 돌아오는 장날이면 온 식구들이 하루종일 정신없이 가게에 매달려 쉴새없이 물건을 팔아야 했고 나는 터미널까지 정신없이 물건을 배달했다. 좁은 골목길을 짐자전거에 물건을 가득 싣고 “짐이요, 짐! 짐!”하고 외치며 점심 먹을 시간조차 없이 바쁘고 고단한 하루를 보냈다. 날씨가 쌀쌀해지면 우리집 식구들 모두가 밖에서 장날 손님들을 맞이하느라 추위에 떨어야 했고 작은형은 늘 손에 동상이 가실 날이 없었고, 장날 저녁이면 몸살을 앓아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장호원 시장통에서 그 어느집 보다 부지런하고 열심인 가족들이지만 모두가 고단하고 힘든 일상이었다.

그런데 몹시도 추웠던 어느 장날에 장사가 다 끝나갈 무렵, 어머니는 감기 기운이 있는 가족들을 위해 어머니 친구가 운영하는 약국을 가셨던 모양이다. 약국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후끈한 열기와 구공탄 난로 위에 가래떡이 익어가는 것을 보시고는 힘들게 고생하며 그릇가게를 하는 우리집 자식 중에 한 명은 이렇게 편안하게 앉아서 손님을 맞는 이런 약사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약사가 아닌 신부가 되었다. 지금도 따뜻한 난로 위에 가래떡이 놓인 것을 보게 되면 어머니의 말씀이 생각난다. 오늘도 칠십 중반의 우리 어머니는 힘들게 사는 큰아들과 사제로 홀로 사는 외로운 신부를 위해 걱정하신다.

어머니! 어린 시절 물건을 배달하고 외상값을 잘 받아오던 셋째가 어머니의 작은 소원인 약사는 되지 못했지만, 내적인 마음의 병으로 인생을 고민하는 어려운 이들을 위한 사제요, 고통받는 이들을 위로하는 가정 지킴이가 되었으니 이 또한 어머니의 큰 소원을 이룬 것입니다.

송영오 신부 (수원교구 가정사목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