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미술의 해 기획특집] 가톨릭의 거장들 4 운보 김기창

이종상ㆍ요셉ㆍ서울대 미대교수
입력일 2012-08-30 수정일 2012-08-30 발행일 1995-07-23 제 1963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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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와 본질의 조화 통해
세계화단에 우뚝선 거봉
순수미 추구하며 민화「바보산수」에 심혈
용광로같은 예술혼…동서 회화기법 통달
운보의 작품세계

선생의 예술을 나 나름대로 표현한다면 「무위(無爲)와 본질(本質)의 조화」라고 하고싶다. 「무위」라 함은 하느님이 주신 어린이 같은 순수한 영혼을 말하며「본질」이라 함은 타고난 감성과 샘솟는 정열과 뜨거운 가슴을 말한다. 선생의 예술세계는 무위불위하며 무불통달이다. 사실화로부터 추상화는 물론이고 극채색화(極彩色畵)에서 수묵화에 이르기까지 산수, 인물, 초상, 화초, 초충, 개화, 벽화, 성화에 이르기까지 능치 않은 화목이 없다. 오히려 서로 다른 것 같은 개별의 화목들이 하나의 거대한 운보예술의 화목들이 하나의 거대한 운보예술의 용광로 속에서 빛나는 합금이 되어 분출되기에 우리 화단의 자존으로, 만인의 스승으로 남는 것이다.

고금동서의 회화기법에도 통달할 수 있었던 것은 스승으로부터 받은 철저한 전통의 바탕위에 신체적 장애를 뛰어넘는 방대한 독서량과 만리행의 체험속에서 피나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외적 요인보다 인간의 체온과 영혼을 불어 넣을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와 아내로부터 받았던 아가페적인 사랑을 작품속에 승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지녔으며 또 예술을 통해 받은 것만큼 사랑을 30만 장애자들에게 베풀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금년 83세의 고령임에도 선생께서는 한곳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시도와 코페르니쿠스적 전이로 자신에 도전함으로써 또 다른 가능성을 여는데 여념이 없다.

이것은 평생을 일관했듯이 선생께서 한국미술의 줏대를 세우는 탐색이며 사랑을 실천하는 작업이고 하느님께 영광 돌리는 감사의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뜨거운 거인 운보

선생은 1914년 서울 운니동에서 광산업을 하는 부친 김승환 옹과 모친 한윤명 여사의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모친은 개화기의 신여성으로 독실한 개신교신자였고 진명여고 1회출신이다. 김화백의 모친은 8세때 장티푸스의 후유증으로 농아가 된 아들을 지극한 모성애와 교육열로 오늘의 거인, 운보를 만드는데 초석을 마련해 주었다.

모친은 목수가 되기를 원했던 부친의 반대를 감내하며 끝내 이당의 문하생으로 운보를 맡긴다. 그로부터 반년만에 아들이 선전(鮮展)에 입선(入選)하자 어머니께서 손수 운포(雲哺)라는 아호를 지어준다.

그러나 그토록 애틋한 사랑을 쏟았던 모친은 다음해 35세의 젊은 나이로 자식앞에서 운명함으로써 평생동안 추모의 정을 품게한다. 조국의 광복과 함께 차유를 갈망하는 뜻에서 운포의 포(哺)자에서 모자를 벗어 던지고 보(甫)자로 고쳐 쓴 것 이외는 평생동안 모친께서 지어준 화명을 고집해 쓰고있다. 끝내는 어머님의 고향인 충북 청원군 북일면 현동리에「운보의 집」을 마련할 정도로 효성과 그리움이 극진했다. 선생께서 30세때 당시 선전에 총독상을 수상하기 위해 귀국했던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 재학생인 박래현(朴來賢)씨를 만나 해방 이듬해 결혼함으로서 제2의 변모가 시작된다. 부인의 피나는 노력으로 입이 열려 어느정도의 대화가 가능해짐으로서 자신감을 얻어 선생께서는 이때부터 상식을 초월할 정도의 공부를 시작하여 많은 글과 화문집을 발간하게 된다. 두 분 사이에 장녀 현, 장남 완, 차녀 영을 두고 국내외로 부부전과 개인전을 연이어 개최하며 동양화의 현대화와 한국미술의 국제화에 앞장섰다.

그러나 선생에게 화가의 길을 가게해준 모친처럼 화가로서 성숙할수 있게 헌신했던 아내 우향(雨鄕)마저 76년에 타계하자 붓을 던지고 해외여행을 떠난다.

귀국후 그 슬픔이 승화되어 더욱 순수성으로 치환되면서 『바보란 천재의 다른 이름일 뿐』이라며 바보의 눈으로 보는 순수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민화와 바보산수에 정열을 쏟는 한편 우향에 대한 많은 기념사업을 벌였다. 운보는 81년에 국민훈장 모란장을 서훈받고 예술원 정회원이 된다. 이제 한국화단뿐만 아니라 세계 화단에 우뚝 솟은 거봉이 되었지만 늘 순수하고 뜨겁기만한 선생의 가슴속에는 자신과 같은 불우한 농아들을 돕는 일로 꽉차있다. 세계 농아연맹의 부위원장이 될 정도로 농아복지사업에 대한 열정은 뜨겁기만 하다.

운보의 신앙ㆍ예술

선생의 신앙에 대한 근원은 늘 기도로서 자식의 장래를 간구했던 모친으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생각된다. 감리교인이었던 모친이 자식을 부탁하면서 이당 선생이 속해있는 장로교로 교적을 바꾼다. 그런 모친을 사별한 청년 운보는 주님을 섬기기 위해 36년 안국교회에서 김우현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는다. 46년 우향 박래현과 결혼하고 4년만에 6.25를 맞아 이듬해 처가가 있는 군산으로 피난을 간다. 바로 이때 그 유명한 30여점의「예수 일대기」가 3년에 걸쳐 제작된다. 모친을 여윈 후 선교사 한 분이 『당신도 장래에 한국의 성화를 완성할 수 있는 힘을 지금부터 양성하기 바랍니다』라고 권유했다. 모친에 대한 추모의 정이 남달랐던 선생은 피난자에서 어느날 꿈을 꾸게 된다. 꿈속에서 예수님의 시신을 안은채로 지상에 오르면서 몹시 통곡을 했는데 아내가 흔들어 깨어보니 실제로 울고 있던 중이었다. 선생께서는 이것이 동족상잔의 비통함과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는 눈물이었음을 깨닫고 곧 성화작업에 착수했다.

54년에 상경하여 화신백화점에서 성화 전시회를 개최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선생께서 가톨릭적인 소재를 처음으로 제작했던 작업은 43세 되던해인 56년, 차녀인 영(瑛)이 잉태되면서부터이다. 이때부터 어떤 형언할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순백의 성당종탑을 배경으로 가녀린 수녀님이 하얀 비둘기를 가슴에 안은 채 하늘을 우러러보고 있는 2백호 크기 작품을 일년만에 완성하였다. 그로부터 28년후 차녀 영은 아녜스 수녀가 되어 필리핀 오지로, 수녀 그림은 교황에게 기증되어 바티칸으로 아버지와 작가의 곁을 떠나 주님께 다가갔다.

그해 봄, 「운보의 집」입주식이 있던날은 유난히도 청명했다. 그날 많은 내빈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지붕너머로 오색 무지개가 피어올랐다. 신부님께서 『이 집은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백성의 집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말씀하기도 했다.

선생께서는 그때의 감격을 『몸둘바를 모르고 내 인생을 확 바꿔주는 것 같은 힘을 느꼈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길잡이가 되었다.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백성이라 지금도 내 일생동안 조심해서 하느님이 싫어하시는 일은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늘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다. 하느님의 축복을 받아서 감사한다』고 종종 회상하곤 한다.

사랑하는 딸도 작품도 모두 하느님께 봉헌하고 다음해 85년, 성라자로 성당에서 김수환 추기경으로 부터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는다. 자신이 베드로와 닮은점이 많다고 하여 지어준 세례명이라며 몹시 즐거워 하기도 했다. 선생께서는 『종교가 곧 예술이고 예술은 마지막 종교이며 분리할 수 없다』고 말씀하곤 했다. 92년도에는 병환으로 혼절하여 호흡이 거의 끊긴채로 수족에 반점까지 생기며 세번씩이나 혼수상태에 빠진적이 있었다.

『내가 길고 어두운 터널 속을 빠져나와 안개 자욱한 곳을 헤매는데 형상이 하느님같은 큰 빛이 다가와 아직 올때가 안되었다고 떠밀어 돌아와보니 식구들과 신부님이 지켜보고 있었다』고 말했다. 선생께서는 주님안에서의 영생을 믿으며 지옥과 연옥, 천당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으며 하느님이 당신을 굉장히 사랑해 주고 계시다고 믿음으로써 조금만 아프거나 언짢은 일이 생겨도 당신이 게으르고 그림을 열심히 그리지 않아서 벌을 주신 것으로 믿는다. 또 선생께서는 어느날 꿈에 하느님이 나타나셔서 붓을 주시며 『너는 듣지를 못하니 이 붓을 준다. 잘 쓰고 내게 돌려주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것을 생시에 주님의 말씀으로 믿고 『붓을 잘 빨아서 주님께 돌려드려야 된다』고 어린애처럼 몇 번씩이나 되뇌인다. 선생께서는 이렇게 주일미사를 거르지 않고 살아계신 주님과 무언의 대화를 나누며 신앙과 창작생활을 은총과 축복 속에서 조화시킨다. 이제 남은 생애를 주님보시기에 참으로 좋은 예술가로 남기를 바라며 30만명에 이르는 농아복지사업에 총력을 기울이고 싶다고 한다. 김선생은 『주님이 도우시어 미국서 디자인을 전공한 아들 완(完)이가 월급도 없이 아버지의 뜻을 잇게 해주어서 주님께 감사하다』며 대견스레 아들을 바라보며 함박웃음을 웃었다.

주님! 『우주는 모두 하느님이야, 오직 한 분만이 계실 뿐이야』라며 자자손손 야훼로부터 축복을 약속받은 아브라함으로 세례명을 바꾸어 달라고 어린애처럼 조르던 저 순진무구한 베드로에게 건강을 허락하시어 그가 주님의 종으로 더 많은 일을 할 수있게 하소서.

이종상ㆍ요셉ㆍ서울대 미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