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주말 명순례지 특선] 15 구산(龜山)

박영호 기자
입력일 2012-08-27 수정일 2012-08-27 발행일 1995-05-14 제 1953호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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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백50년 순교혼 이어온 전통교우촌
박해시대 자취 원형대로 보전
6.25땐 원로신부들 안식 제공
소나무와 어우러진 청동빛 14처상 박해참상 짐작케…
가톨릭 신문과 함께 떠나는 가족 성지순례
팔당부근 한강변에 위치한 구산(龜山)마을은 순교자들의 숨결이 1백50여년이 넘도록 고스란히 살아 숨쉬는 곳이다.

서울에서 불과 1시간내에 시원스레 뚫려있는 강변도로와 중부 고속도로를 통해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교통상의 편리함도 구산성지를 찾는 이들에게 매력적인 요소이다.

구산성지 또는 구산마을이라고 할 때 어느곳을 말하는지 잘 모른다고 해도 미사리 조정경기장 하면「아! 그곳」하며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구산(龜山)」이라함은 마을을 둘러싼 뒷산이 거북이 형상을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거북형상을 한 마을

이번 주말에는 순교자들의 후손이 교우촌을 이루고 살며 신앙의 꽃을 소담스럽게 피우고 있는 구산성지를 찾아보는것도 괜찮을 듯하다.

경기도 하남시 망월동에 위치한 구산마을은 몇가지 면에서 그 교회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먼저 구산은 1백3위성인중 71번째인 김성우(안토니오) 성인을 비롯해 박해시대에 많은 순교자가 탄생한 유서깊은 성지이다.

특히 구산은 성 김성우의 후손들이 대대로 살아오며 묘소를 가족묘지에 이장, 보존하고 있어 우리나라에서 박해시대의 자취가 가장 원형대로 남아있다는 곳 중 하나라는 점에서 중요성을 갖고있다.

신앙으로 주민 일치

더군다나 1백50여년 동안 교회를 지키며 신앙생활을 확고하게 지켜가고 있는 교우촌으로 도시화로 인한 급변속에서도 구산마을은 한마음으로 신앙안의 일치를 잃지 않고 있다.

6.25당시에는 원로신부들의 피신처로 구산마을은 아주 적합한 곳이었다. 낮에는 곳곳에 무성한 사람키보다 더 큰 갈대숲사이에서 숨죽이고 엎드려 있다가 저녁에 살금살금 나와 지친 몸을 쉬었다고 한다. 쭉 뻗은 강변도로와 그 아래 미사리 조정경기장은 구산마을을 들어서는 순례객들의 가슴을 시원하게 해준다. 도로 건너편 골목으로 조금만 걸어들어가면 시골성당의 정취를 물씬 풍기는 아담하고 아름다운 구산성당이 나온다.

성당 가는 길 주위에는 온통 비닐하우스들이 늘어서있다. 옛날에는 쌀농사가 주업이었지만 지금은 비닐하우스 상추재배가 주민들의 생업이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상추는 농약을 치지 않고 전량 유기종으로 재배되고 품질에 있어서도 전국 어느곳보다 우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당을 찾는 이들은 항상 웃는 얼굴로 방문객을 반기는 구산성당 주임 이용남 신부의 사람좋은 목소리에 마치 시골 외갓집을 온 기분이 된다. 구산마을의 순교의 터전이요, 신앙 공동체를 이루는 교우촌이기 때문에 성당은 마을의 대소사에 있어 이신부는 항상 주민들의 의논상대가 된다.

외갓집 같은 푸근함

성당 곳곳에 조화를 이루고 피어난 꽃과 나무들은 이신부와 뜻있는(?) 몇몇 신자들이 이곳저곳에서 허락없이「빌려(?)」심어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앞으로도 무허가로「빌려」오는 일은 계속 될 것이라며 이신부는 웃는다.

성당에서 걸어서 10분 남짓 거리에 개발돼있는 구산성지에는 사람키보다 약간 높은 야트막한 기와 담장이 둘러처져 있다. 고개를 빼고 담장안을 넘겨다보는 순례객들은 마치 이 담장이 성속(聖俗)을 가르는 경계선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담장을 돌아 성지로 통하는 문을 들어서면 꽤 넓게 펼쳐진 잔디밭 가운데 서너개의 돌계단을 올라 도드라진 둔덕위에 날렵한 솜씨로 세워진 성모상이 보인다. 이 성모상은 고(故) 김세중(전서울대미대 학장) 화백이 조각, 지난 83년 축성된 것이다.

성모상과 함께 성지안을 돌아보면 오른쪽으로 자그마한 기와대문이 보이고 그안으로 청동빛의 고색창연한 14처상이 들여다보인다. 구비구비 말려올라간 소나무들의 푸른 빛이, 십자가를 진 예수를 향해 시퍼렇게 날선창을 겨눈 병사들의 청동빛과 어우러져 성뜩할 정도로 처절했던 순교 당시의 고통을 이야기해주는듯하다.

숙연한 마음을 가다듬고 문을 들어서 14처를 한바퀴 돌아 성 김성우 안토니오 현양비와 묘소앞에 서서 잠시 눈을 감고 죽음 앞에서도 의연하게 신앙을 택했던 그의 풍모를 기린다.

성속경계 기와 담장

양반의 자제로 유복한 살림과 존경받는 가문에서 남부러울 것 없었던 그가 신앙의 험로를 걷기 시작한 것은 1830년경으로 알려져있다. 경주 김씨 계림군파(鷄林君派)의 15대 손인 김영춘의 맏아들로 정조19년(1795) 구산에서 태어난 그는 두 동생과 함께 세례를 받고 친척, 이웃들을 입교시켜 이 지역을 교우촌으로 만들었다.

한동안 유방제 신부를 모시고 회장직을 수행하며 온 마을에 복음을 전한 그는 1836년 모방(Maubant) 나(羅)신부가 입국하자 자기 집에서 모방 신부를 모시기도 했다.

1839년 기해박해때 체포됐다가 간신히 풀려났던 그는 1840년 다시 가족들과 함께 붙잡혀 서울 포청으로 압송됐다. 포청에서 형조로 이송돼 갖은 고문을 당한 그는 배교를 강요하는 재판관에게 『나는 천주교인으로 살고 죽어도 천주교인으로 죽을 것입니다』라고 결코 신앙을 굽히지 않았다.

김성우 성인의 고향

요지부동의 굳은 신앙에 결코 그는 이듬해 4월 47세의 나이로 순교했고 1925년 7월 복자위에 올랐다가 마침내 1984년 5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됐다.

현재 1백20여세대 5백여명의 교우들이 살고 있는 구산마을은 급격한 도시화와 이농현상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신앙공동체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귀중한 교회이며 순교의 얼이 살아있는 곳이다. 길을 가다 만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같은 하느님을 믿는 형제이기에 구산마을은 이웃집 친구를 만나러가듯 정겨운 마음으로 찾아가 볼만한 곳이다.

■교통편 안내

▲대중교통 이용시

서울 천호동 시외버스 터미널이나 지하철 성내역에서 16~1번 시외버스를 이용해 미사리 조정경기장, 또는 구산성당앞 하차

▲승용차 이용시

경부고속도로를 이용할 경우 한남대교 진입전 우측 올림픽대로, 중부고속도로 이용시에는 신장 I.C-황산-조정경기장-선리를 거쳐 성지에 도착한다.

박영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