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미술의 해 기획특집] 가톨릭의 거장들 2 하라 이순석

권순형ㆍ서울대 명예교수
입력일 2012-08-27 수정일 2012-08-27 발행일 1995-04-16 제 1949호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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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용미술의 거두… 조형예술 발전에 초석
80대1 경쟁뚫고 동경미술교 입학 
디자인계 선구자 무궁화대훈장 도안 
의사당 해태상 등 석조각 2천4백여점 남겨
이순석 선생은 석학들의 회고기(1974.3.9 경향신문)에서 다음과 같이 서두에 기술하고 있다.

『일생동안 도안과 석공예를 중심으로 몰두해 왔고 지금도 내 작품속에 파묻혀 살고 있으며 종교적으로는 출생이후 현재까지 천주교교인으로서 살아왔다』

여기서 말한 바와 같이 이순석 선생은 독실한 천주교신자 이병무(李秉武) 선생의 9남매 중 막내로 충남 아산에서 태어났다. 원명은 평래(平來)이며 1905년 1월 7일생이다.

선생은 어린시절부터 남달리 그림 공작 음악(바이올린) 등 예능에 뛰어난 재주를 보여, 주위 사람들로 하여금 신동이라는 말을 듣고 자랐다. 또한 언제나 윗어른에게 순종하며 평소 조약돌을 가지고 놀기를 좋아해서 그를 순돌(順石)이라고 불렀다는데 이는 끝내 예술가로서 이름을 떨치게된 본명이 되고 만다.

선생은 아산 공세리에서 유년기를 보낸다. 독실한 천주교가정에서 자라난 선생은 아산 본당 프랑스인 성일론(成一論ㆍ데뷔스 엘릴리오) 주임신부의 각별한 사랑을 받으면서 성장하게 된다.

예술에 상당히 조예가 깊었던 성신부의 영향을 받은 하라 선생은 학교에서 돌아오면 주로 성당에서 놀면서 성신부로부터 예술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게 된다.

13세때 서울로 올라 와서는 서울역 부근 봉래동에 있던 남대문상업학교(현 동성고등학교)에 다니면서 고희동(高羲東) 화백이 운영하는 서예협회의 회원에 가입하고 서양화(油畵)를 공부했다. 한편으로는 중림동 성당에 열심히 다녔다. 이 성당에도 역시 프랑스인 우일모(禹一模ㆍ빌 모어) 신부가 있었다. 우신부는 하라 선생이 미술공부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19살 되던 해에 성당 제대양쪽벽에 걸 성화를 부탁해 하라 선생은 80호짜리 성베드로와 성바오로의 성상을 그리게 됐다. 우신부가 이 그림을 매우 흡족해 하면서 성당 양쪽벽에 걸어주었다는 일화도 있다.

하라선생은 1925년 일본으로 건너가 미술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밤낮없는 수련이 계속 되었다. 당시 동경 미술학교 입학경쟁률이 약 80대1로 도안과 15명만을 뽑을 때였다. 하라 이순석 선생은 당시 한국인으로는 도안과에 입학한 최초의 미술생도였다. 하라 선생은 1931년 3월 동경 미술학교 도안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그간 배운 것을 고국에 펼쳐 보겠다는 포부를 갖고 서울로 돌아와 첫번째로 공예도안전을 열었다.

그해 6월 동아일보사 강당에서 열린 이 전시회는 선생의 첫 개인전이였을뿐 아니라 우리 나라에서 열린 최초의 도안전시회이기도 했다. 이 전시가 인연이 되어 종로에 자리잡고 있던 박흥식(朴興植)씨가 경영하는 화신 백화점에 근무하게됐고 광고와 선전 미술분야를 담당하는 과장으로 화신을 새롭게 단장하고 판매 촉진의 업무를 맡게 됐다.

서울로 돌아온 이순석 선생은 소공동 2층집을 빌어 1층에는 낙랑(樂浪)파라는 찻집을 내고 2층은 화실로 꾸며 거의 매일 가까이에 있는 덕수궁 박물관에 들러 옛 공예품을 관람하면서 미술 공부를 했다. 낙랑파는 지금의 다방과는 달리 프랑스 파리에 유행했다는 살롱과 비슷해서 문인 화가 음악인 그리고 예술지망생이 주로 모여 고전음악을 작품구상을 하는 등 예술가들의 집회소 구실을 했다. 이러한 모임의 장소는 일제의 문화말살이라는 억압속에서 오래 못가고 3년후 문을 닫게 된다. 그후 하라 선생은 형인 이명래(李命來)씨가 경영하던 종기치료소 「이명래고약」에서 일을 하게 되지만 미술가의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

미 군정때인 1946년 선생은 군정 문교부 고문관으로 일하면서 당시 서울대를 국립종합대학으로 개편하는데 있어서 미술대학을 신설하는데 많은 기여를 했다.

지금 고인이 된 고희동 이종우 화백과 미국에서 현재 살고 있는 장발 선생과 협의, 독립된 단과대학으로 설립하지는 않았지만 예술대학 미술학부로 발족시키기에 이르렀다.

한편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된 후 디자인의 선구자였던 하라 선생은 대통령의 상징인 무궁화 대훈장을 비롯, 입법 행정사법부의 온갖 심벌마크와 휘장을 디자인했다. 또 이선생은 서울대 미대의 기반을 닦기 위해 대학의 강단에서 새로운 응용분야를 개척하여 오늘날의 공예와 디자인계가 활발하게 산업발전에 기여토록 이루어 놓았으며 우리 고유의 전통공예가 진작과 현대적인 새로운 감각을 접목시키는데도 크게 기여했다. 이순석선생은 한국전쟁당시 국방부 종군화가단장으로 병사들과 함께 참전, 기록화를 제작하는데 참여하기도 했다.

이순석 선생은 후암동성당에 예수 성면 십자상과 오석(烏石)제대, 일월 성수반 등을 직접 제작하여 봉헌했으며 유럽 순방중에는 교황 요한 23세께 기증한 「혈자 십자 성수기」가 로마 바티칸성당에 소장되어 있기도 하다.

또한 1962년부터 10여년간 서울가톨릭미술가회 회장 재임시에는 교회미술의 현대화와 한국적인 토착화 그리고 회원상호간의 끈끈한 유대며 공동의 관심사를 도출하는데 크게 기여하였고 해마다 가톨릭 미전도 개최했다. 정년퇴직후 선생은 1979년 이후 한동안을 미국에서 체류하다가 말년에 이르러서는 청담동에 자리를 잡고 그곳 성당신축에도 헌신적인 봉사를 하였는데 청담동성당 입구에는 화강석으로 만들어진 거작인 피에타상이 놓여져 있다. 그리고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창세기의 의미와 귀일의 법칙을 공간의 운동속에 담은 작품 「생성」을 제작했다.

서울미대 재직시인 1962년 미술계로서는 두번째로 대한민국 문화훈장을 수상했고 국전에서도 초대작가, 심사위원, 운영위원으로 미술진흥에 공헌했다. 1969년에는 영예스럽게도 제1회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대통령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977년에 여의도에 국회의사당이 신축됨에 따라 도약을 상징하며 서있는 해태석상 한 쌍을 정문앞에 우뚝세워 대한민국 국회의 위상을 드러내는 등 지금까지 제작된 석조예술 작품의 수는 도합 2천4백여점을 넘고 있다. 이렇게 선생이 심혈을 기울여서 개척적인 업적을 남겨 놓은 것은 이 나라의 조형 예술이 힘차게 웅비할 수 있는 맑고도 확실한 이정표가 되리라 생각된다.

한국예술의 태두이며 현대공예발전에 거목이었던 하라 이순석 선생은 대한민국 예술의 원로회원으로서 그 생애를 마칠때까지 일관된 신앙생활과 고매한 예술의 경지를 소신껏 불태운 금세기 이 나라의 지울 수 없는 별이었다.

선생이 이 땅에 남긴 선구자적인 예술활동은 다시 후학들의 손에 의해 꽃피워짐으로서 유구한 민족문화의 초석이 되고자 했던 그의 꿈이 헛되지 않았음을 볼 수 있다.

권순형ㆍ서울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