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광복 50주년 특별기획] 한국 천주교회의 어제 오늘 내일 42 - Ⅶ 현대 한국 가톨릭교회와 국가 4 박정희 정권과 교회

김녕ㆍ숙대ㆍ서강대 강사, 정치학
입력일 2012-04-03 수정일 2012-04-03 발행일 1996-10-27 제 2025호 16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권위주의에 도전… 예언자적 사명 수행
‘지학순 주교 사건’ 계기 정의사제단 결성
“유신체제 부도덕ㆍ반국가적”비판
80년대 말까지 민주화 인권 통일위한 적극 행보
해방 이후부터의 교회-국가 관계사를 간략히 살펴보면, 박정희 정권의 유신체제 수립 전후에 이르도록 천주교회는 거의 항상 소극적ㆍ보수적ㆍ친 체제적 성향을 계속 드러냈음을 보게 된다.

1940년대 말의 미군정 당시 교회는 미군정 및 지배세력과 긴밀한 연계를 유지했고, 그 이후 교회는 처음에는 이승만과, 그 다음에는 장면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1950년대 말기에까지 교회가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한 공헌이라고는 1960년 4ㆍ19 혁명의 결과로 권력을 잡게 된 한 사람, 장면을 지지하는 것 정도였다. 교회는 4ㆍ19 혁명을 위해 어떤 중요하고도 능동적인 기여를 하지 못했고, 게다가 박정희의 1961년 5ㆍ16 군사 쿠데타에 대해서도 침묵을 지켰고 친 체제성향을 계속 드러냈다. 그러던 천주교회는 1960년대 말부터 서서히 사회ㆍ정치적인 문제에 대해 예언자적 입장을 취하기 시작하였고, 1974년의 「지학순 주교 사건」을 기회로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 사제단」이 결성되자 교회와 국가는 첨예한 갈등구도 위에 서게 되었으며, 1980년대 말까지 한국의 민주화와 인권 및 통일을 위한 적극적인 역할을 계속 했다. 이 글에서는 한국 천주교회의 정치적 개입과 교회-국가 갈등, 그리고 민주화운동이라는 주제들을 중심으로 박정희 정권 하에서의 교회-국가 갈등을 간략히 정리해보려 한다.

교회-국가 갈등

1960년대 말 이래 두드러진 제3세계 천주교회들의 사회ㆍ정치적 개입이라는 전례없는 변화는 통상 다음의 두 가지, 즉, 대외적인 요인으로서 해방신학을 포함하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새로운 사회적 가르침들의 영향 및 대내적인 요인으로서 각국에서의 억압적인 권위주의적 지배에 대한 교회의 내적 반응으로 설명되며, 한국의 경우, 교회의 정치적 개입이 활발했던 1970년대(에서 1980년대 말까지)는 바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영향과 더불어 극도의 권위주의적 폭압성이 공존했던 기간이었던 것이다. 허나, 더 직접적으로 한국을 비롯한 제3세계의 경우에 천주교회의 정치적 개입을 불가피하게 했던 것은 권위주의 정권이 교회의 구성원의 인신(人身)에 직접적인 위해를 가했기 때문이었다. 한국의 경우엔 1974년 7월에 원주교구의 지학순 주교가 「민청학련」 학생들을 도와주었다는 혐의로 중앙정보부에 의해 체포된 것이 계기가 되었다(「지학순 주교 사건」).

권위주의 정권 하에서는 교회 특유의 예언자적 역할(prophetic role)이 정치적 반대(political opposition)로서 구체화되기 때문에 교회-국가 갈등(Church-state conflict)이 불가피하다고 볼 수 있다. 그 갈등은 우선, 제3세계 군부 권위주의 정권들의 전형적인 정치적 도그마들(political dogmata)이었던 국가안보ㆍ반공ㆍ경제발전이라는 지배 이데올로기의 비인간성 및 비민주성에 대한 교회의 이데올로기적 대응이라고 볼 수 있다. 교회 문서들은 「정의를 위한 개혁 활동」즉, 정의 활동을 위한 교육과 의식화, 불의와 인권침해에 대한 비판 등이 교회의 사목 활동 및 복음화 활동의 하나라고 파악하고 있고, 다만, 성직자가 정부, 정당 및 노동조합의 고위직을 차지하는 것은 금하고 있다. 남미의 군사정권 하에서도 보여졌듯이, 교회의 대응은 조작된, 혹은 실질적인 이유에서 반체제 인사들에게 가해진 탄압과 억압적 조처에 대한 주교들의 비난 및 농민과 노동자들에게 부과된 과중한 짐에 대한 주교들의 공적인 항의 등의 인권보호 활동 등이 포함되었고, 군부는 교회의 이러한 개입에 대해 『교회 성직자들이 정치에 간섭(meddling in politics)하고 있으며』, 『교회의 하층부에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침투(infiltrate)해 있어 반란을 도모하는 반체제 인사들의 도피처로 이용된다』는 것이다. 정교분리 교의(the doctrine of separation of church and state)를 이런 식으로 해석하는 군부 정권의 입장 그 자체가 교회의 입장과 갈등을 일으킨다. 한국의 경우에 박정희 정권이 교회의 정치적 개입에 관해 견지한 입장도 이와 동일했다.

사회정의 위해

권위주의 정권은 교회의 정당한 사회적 행동과 체제전복(subversion)을 구분하는 것이 외견상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사회정의를 위한 교회의 행동 및 권위주의 정권의 응답에 대한 교회의 반응은 정부의 공격에 의해 최초로 점화된 악순환의 고리(a vicious cycle)를 돌게 되었던 것이다.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면서 1960년대 초부터 시작된 경제개발 계획의 실행으로 한국 사회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산업화되어 사회ㆍ경제적 구조 및 국민의 생활과 가치관의 거의 모든 분야에 막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허나, 이러한 급속한 경제성장이 수반한 심각한 부작용은 연간 국민총생산 성장률 15.9%라는 최고점에 달했던 1969년부터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농촌사회의 피폐, 가속되는 이농현상과 도시빈민의 증가, 빈부의 격차 심화와 비인간적인 노동조건, 증가 일로의 외채와 외세 의존도,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의 부정부패 등등이 그것이었다. 전반적인 사회경제적 조건들과 박대통령의 정치권력 강화 및 연장을 위한 시도들은 국민들, 특히 학생, 노동자, 도시빈민들을 자극했다. 가장 극적인 사건들은 한일회담에 대한 반대(「6ㆍ3 사태」), 평화시장 재단공 전태일의 분신, 광주 대단지 봉기, 그리고 유신체제(1972-79)에 대한 반대 및 수립 등이었다. 이러한 사건들 때문에 노동자, 종교인, 그리고 학생들로 이루어진 몇몇 재야 단체들이 결성되었고 전태일의 분신으로 민주적, 경제적, 그리고 인간적 권리를 찾기 위한 재야 운동들의 발전에 중요한 전기가 마련되었다. 그리하여, 1979년에 박대통령이 암살되기 전까지, 정치가, 학생, 노동자, 성직자, 그리고 농민을 포함하는 반대세력의 수가 늘어났고 그들의 반정부 시위는 규모와 빈도수에 있어 증가하였다.

교회는 사회ㆍ정치적 현실과 동떨어져 진공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 천주교회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1961-79년까지 이어진 박정희 독재정권에서 기인하여 1960년대 초부터 발생한 이러한 광범위한 문제들에 대응해야 할 책임감을 느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65)는 교회를 격려하는 징표가 되었다. 아직 개개인의 차원을 넘어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을 충분히 이해하고 실천하지는 못했지만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영향력은 점진적으로 교회에 미치게 되어 교회의 사회ㆍ정치적 공간에의 참여를 설명해 줄 신학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기반이 되었다. 따라서, 1960년대 말부터 한국의 교회-국가관계는 점차 갈등관계에 있게 되었다.

먼저, 1966년 5월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는 교회전체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을 수용하도록 독려하는 사목교서를 발표했고, 또한 주교들은 「우리의 사회신조」라는 제목의 1967년 6월의 사목교서에서 증가일로의 사회ㆍ경제적 문제점들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였다. 이어서, 1968년 1월의 강화도 「심도직물 사건」(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시회적 가르침들을 소개하고 심도직물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결성운동을 이끌었던 전 미카엘(Michael Bransfield) 가톨릭 노동청년회 지도신부 및 천주교신자 노동자들이 체포되었음)으로 교회는 주교들과 가톨릭 노동청년회(J.O.C. : 지오쎄)를 통해 처음으로 사회ㆍ정치적 상황에 직접 개입하게 되었다. 1969년에 김수환 주교가 추기경이 되고 나서부터 한국 천주교회는 국제적으로 더욱 알려지게 되었고, 사회ㆍ정치적 문제에 대해서 김추기경이 견지한 진보적이고 초교파적인 입장은 가톨릭과 개신교의 성직자들 및 평신도 지도자들로 하여금 서로 협력하여 한국의 민주화와 인권을 위해 투신하도록 격려했다. 1970년대와 1980년대를 걸쳐 김추기경은 천주교회의 민주화와 인권운동의 정신적인 지도자 역할을 했으며 여타 민주화 세력들도 도덕적 권위를 지닌 천주교회에게서 준거점을 찾았다고 볼 수 있다.

교회-국가 갈등과 교회의 사회ㆍ정치적 참여는 1970년대 초에 들어와서 현저하게 강화되었다. 1971년 10월 5일, 1,500명 이상의 평신도들과 성직자들이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와 교구사제들이 집전하는 원주교구의 미사에 참례한 후 거리로 나가 부정부패 추방궐기대회를 한 것이 하나의 신호탄이었다고 볼 수 있다. 3일간의 연좌시위의 목표는 1) 정치적 불의에 대한 인간 존엄성의 수호, 2) 조직화된 경제불의에 대한 투쟁, 3) 소외계층의 단합과 연대의식의 고취, 그리고 4) 무감각을 극복하고 참여와 희망을 갖게 하자는 네 가지였다. 그해 11월엔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도 이런 시위를 옹호하여 『오늘의 부조리를 극복하자』라는 제목의 사목교서를 발표했다.

원주교구가 원주 문화방송국의 불법적이고 부패한 관행들을 고발하면서 시작된 이 탄핵은 사회 전반적인 불의에 대한 항의였다. 그 밖에도 1970년도엔 구조적 부패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탄핵이 일반화되어 있었다. 동시에 정부는 천주교와 개신교 교회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였다. 이러한 성명서들과 활동들은 교회 전체는 물론, 교회의 방관과 침묵에 더욱 익숙해 있던 정치 지도자들 및 사회 대중을 놀라게 하였다.

1974년에는 가장 심각한 교회-국가 갈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중요한 촉매 역할

「지주교 사건」과 정의구현 사제단의 결성이 곧 그것이었다. 지학순 주교가 「전국 민주청년학생 총연맹」(줄여서 「민청학련」) 소속 학생들을 도와주었다고 중앙정보부에 체포된 해가 바로 이때였고, 이것은 곧이어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결성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 정의구현 사제단의 결성은 교회에 가해진 정치적 탄압에 대한 교회의 제도적 대응이었다. 이때부터 사제단은 교회 안팎에서 벌어진 민주화와 인권운동에서 중요한 촉매 역할을 수행했고, 정의평화 위원회, 가톨릭 노동청년회(J.O.C), 가톨릭 농민회, 평신도 사도직 협의회 등 역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들은 1978년의 「동일방직 사건」을 비롯한 노동운동, 1979년의 「오원춘 사건」을 비롯한 농민운동, 1978년의「7ㆍ6 사건」(전주교구 신부들 몇 명이 당국에 의해 삼엄하게 감시당하고 구타당했음)을 비롯한 교권수호활동, 1974년의 「민주회복 국민회의」의 결성과 1976년의 「명동 3ㆍ1 사건」을 비롯한 민주화운동, 1974년 10월 『동아일보』기자들의 「자유언론 실천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언론자유화 운동, 정부의 반공주의 캠페인이 민주화운동을 억압하는 데 이용되는 것을 비판하고 국민의 통일에 대한 염원을 정권 정당화 및 연장의 미끼로 삼았던 유신체제를 반국가적이고 부도덕한 것으로 비판했던 정의구현 사제단의 입장표명, 김지하를 비롯한 양심수들을 옹호하는 인권운동, 그리고, 정부가 집행했던 의심쩍은 사례들에 대해 조사 및 구명운동을 벌였는데, 「민청학련 사건」, 「인혁당 사건」, 서울법대 최종길 교수 고문 사건, 양심선언을 남기고 자살한 서울 농대생 김상진을 위한 추모미사, 그리고 1976년 10월 26일 박대통령을 암살한 김재규에 대한 구명운동 등이 중요했다고 보겠다.

다양성 속의 일치

박정희 정권 시기는 『기본적 인권이나 영혼의 구원이 그러한 판단을 요청하는 때면 언제나, 그리고 심지어 정치적 질서에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도 교회는 도덕적 판단을 내려야 할 책임이 있음』을 강조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Gaudium et Spes 현대세계의 사목헌장, no.76)의 실천이 절실하게 요청되었던 바로 그 상황이었고, 한국 천주교회는 권위주의 정권에 대한 정면도전을 불사하면서 복음 및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에 입각한 예언자적 사명을 수행했다. 비록, 이것 때문에 교회의 정치개입에 대한 논란도 커지기 시작했고 교회의 사회ㆍ정치적 참여를 옹호하고 실천했던 이들은 교회구성원의 다수보다는 소수였음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적극적인 소수와 김추기경은 교회를 대신하여 그리고 교회로서 효과적인 행동을 하였고, 사회와 국가는 그들을 그렇게 교회로서 인식했다. 보수적인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은, 명시적으로 또는 묵시적으로 그들의 입장에 동조하였거나 또는 반대입장을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않음으로써, 결과적으로는 진보적인 입장이 교회의 방침이라고 알려지게 되었다. 이러한 1970년대와 뒤이어 1980년대에 두드러졌던 천주교회의 사회참여는 분명 한국의 민주화 뿐만 아니라 교회의 성장에도 크게 기여했고(1965년-75년 57.2% 증가, 1975년-85년 89.6% 증가, 1985년-93년 60.8% 증가), 교회의 정치적 개입으로 인해 빚어졌던 교회 내의 분열 역시도 성숙된 교회의 「일치」는 「다양성」속의 「일치」여야 함을 교회로 하여금 인식하게 했다. 「다양성 속의 일치」와 「예언자적 사명」의 실천은 교회, 사회, 국가가 한꺼번에 보수화되고 있는 현 시점에도 여전히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하겠다.

김녕ㆍ숙대ㆍ서강대 강사, 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