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광복 50주년 특별기획] 한국 천주교회의 어제 오늘 내일 41 - Ⅶ 현대 가톨릭교회와 국가 3 제2공화국과 교회

조광 교수ㆍ고려대 한국사학과
입력일 2012-04-02 수정일 2012-04-02 발행일 1996-10-13 제 2023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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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국가 “짧은 만남…달콤한 밀월”
국무총리 장면은 “교회의 큰 자랑”
본격적인 정치ㆍ사회적 참여 경험
머리말

한국 현대사에 있어서 제2공화국은 4·19혁명의 결과로 수립된 민주당 정권을 지칭한다. 민주당 정권은 1960년 8월23일 장면(張勉) 내각이 성립된 후 쿠데타로 인해서 1961년 5월18일 제69차 마지막 임시국무회의에서 내각 총사퇴를 결의할 때까지 약 9개월간 지속되었다. 그러나 제2공화국을 논하기 위해서는 4ㆍ19혁명을 이해해야 하므로, 그 혁명 이후 과도기를 포함해서 군사 쿠데타에 이르는 13개월에 걸친 시기를 주목하게 된다.

제2공화국 민주당 정권은 해방 이후 이승만 독재정권과 군사독재체제 사이에 놓여있는 단명한 정권이었다. 그러므로 한국사에 있어서 이 시기의 역사는 간과되어왔다. 물론 이 시기의 교회사에 관한 본격적 논문은 한편도 없다. 그러나 이 시기는 한국현대사에서, 특히 한국현대교회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때이다. 그러므로 제2공화국은 비록 그 존속 기간이 다른 시기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단명했지만 이 시기 교회와 국가의 관계는 별도로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민주당 정권이 교회사에서 큰 의미를 가지는 까닭은 그 정권의 수반이었던 장면(張勉)국무총리가 교회와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독실한 신자였던 장면은 해방 직후부터 한국 천주교를 대변하면서 정계에 진출했다. 자유당 정권하에서 야당 정치인 장면과 천주교회는 탄압을 함께 받는 과정에서 더욱 긴밀히 연결되어갔다. 이러한 정황으로 인해서 민주당 정권 아래에서 교회는 국가와 밀월관계를 가지게 되었고, 교회는 그 정권의 강력한 지지자가 되었다.

이 시기 교회는 자신이 지지하는 유력한 정치인을 통해서 자신의 견해를 한국의 역사 현장에 적용시켜 나갈 수 있었다. 이 같은 경험은 비록 단기간에 끝났지만, 이 경험에 대한 기억은 한국 현대교회사에서 지워지지 않고 확대 재생산 되었다. 그리하여 한국교회에서는 지난 세기 순교라는「피의 경험」과 함께 본격적인 정치적, 사회적 참여를 통해서 「참여의 경험」을 뒤늦게나마 가지게 되었다. 민주당 정권하에서 교회는 이 새로운 경험의 축적이 본격적으로 가능했다. 그러므로 그 기간은 비록 짧다 하더라도, 이 시대가 갖는 교회사적 의미는 지대한 것이다.

역사적 배경

제2공화국 민주당 정권과 교회와의 관계를 올바로 인식하기 위해서 이 시기 한국사 및 세계 교회와 한국 교회사의 특성을 간략히 검토해보고자 한다. 먼저 한국사적 특성으로는 제2공화국의 역사적 조건을 주목할 수 있다. 제2공화국 민주당 정권은 이승만 독재 정권을 타도한 4ㆍ19혁명의 산물이었다. 제2공화국은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분단과 전쟁과정을 통해 비대해진 경찰과 군대라는「강력하고 부패한」국가기구를 이어받았다. 종속적 국제 관계와 텅 빈 국고 등을 물려받았지만, 어떻게 해서라도 혁명을 완수하고 시급한 민생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이 시점에서 민주당 신파의 대표였던 장면이 내각 책임제 하의 국무총리로 선임되었다. 민주당 정권은 혁명과업의 완수와 민생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그 결실을 보기 전에 비합법적인 군사 쿠데타로 인해 정권을 탈취당하고 말았다.

당시 세계의 교회에서는 1958년 교황 요한 23세가 선출된 이후로 점차 변화의 조짐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리하여 1960년 이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개최를 준비하기 위한 노력이 최종단계를 맞았다. 이 소식은 한국교회에도 즉시 전달되었고, 한국의 교회에서도 공의회의 성공을 기원하는 기도가 봉헌되고 있었다. 이렇듯 교회는 자신의 쇄신을 향해서 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한 거부의 자세는 교황 비오 12세 이래 의연히 유지되고 있었다.

한편 한국교회에서는 해방 이후 견지해오던 반동주의의 노선이 계속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1960년에 한국교회 도처에서 거행되었던 6ㆍ25사변 10주년 기념미사에서 아물지 아니한 전쟁의 상처가 그대로 드러나기도 했다. 이미 해방공간과 전쟁의 과정에서, 그리고 이승만 독재 하에서도 교회는 반공 이데올로기라는 일종의 정치사상을 체득해 실천해나갔고, 각종의 선거를 통해서 민주주의의 경험을 축적하고 있었다. 교회는 이렇게 새로이 축적된 경험을 기반으로 하여 그것을 질적, 양적으로 확대시켜 나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가고 있었다. 로마에서 공산주의와의 대화를 착수한 때가 1963년이었음을 감안할 때, 1960년 당시 한국교회의 반공주의 노선은 일견 이해될 수 있는 측면이 있다.

4ㆍ19혁명과 교회

한국교회는 4·19혁명 후 새로운 정치적 경험을 하게 되었다. 교회는 이승만 독재 아래에서 적지 않은 고통을 강요당했다. 당시 교회에서는 『자유당 정권은 공산당과 같이 천주교를 하나의 정당으로 생각해왔고, 가장 적대시하는 야당으로 간주하여 갖은 수단으로 압박을 가하고 민중에게 허위선전을 일삼아왔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4ㆍ19혁명 당시부터 교회는 혁명을 지지하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학생들의 저항이 진행되던 과정에서 학생회나 학교의 지도신부로 있던 성직자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학생들을 돌보았다. 교회의 혁명에 대한 지지와 관심의 표명은 각 본당 단위로도 진행되어갔다. 예를 들면 학생 혁명이 발생하던 당일 서울의 혜화동본당 회장단은 인근에 있던 대학병원들을 방문하여 부상자를 위로했다. 그밖에 시내 각 본당에서도 부상자를 위문하거나 성금을 모금하여 기탁했다. 교회의 이러한 움직임은 부산을 비롯한 다른 지역에서도 진행되고 있었다. 희생자의 장례미사가 서울 명동성당에서 거행되기도 했다. 그러면서 교회는 4ㆍ19혁명을 이승만 독재에 대한 자신의 승리로까지 생각했다.

학생 혁명 이후 7ㆍ29 총선거를 통해 나라의 운명을 결정할 국회의원 선거를 하게 되었다. 이때 교회에서는 신자들에게 투표에의 참여를 호소하고 투표의 기준을 정해 주고자 했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 사상을 생명으로 하는 가톨릭 신자에게 투표할 의무가 있다…(이러한 후보가 없을 경우에는) 차선을 택하고 차선도 없으면 적어도 악을 물리치기 위해 반 가톨릭적, 더욱이 공산 사회주의 사상을 가진 인물이 당선되지 못하도록 최선을 다해 투표권을 행사해야 한다』

교회는 천주교 입후보자들의 면모를 교회 언론기관을 통해서 신자들에게 알리고자 했다. 그리고 10명의 신자가 국회의원에 당선되자 이를 축하하면서 가톨릭 신자 국회의원은 『마땅히 모든 선량의 판단을 밝혀주는 등불이 되어야 한다』고 격려했다. 장면이 국무총리에 선출되자 이 일이 「전국 교우들의 자랑」임을 확인하고 필리핀과 베트남에 이어서 아시아 지역에서는 세 번째로 가톨릭 신자 행정 수반이 탄생한 사실을 축하했다. 서울대교구장 노기남 주교를 비롯하여 교회인사들은 장면 정권에 대한 지지를 분명히 했다. 그리고 서울교구의 김철규 신부 등은 민주당 정권에 있어서 주요 배후인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교회는 장면이 국무총리에 선출된 이후 장면 국무총리에 대해 교회의 요구를 선명히 표명해 나갔다. 즉, 가톨릭 신자인 정치가는 언제나 교회에 미치는 영향을 정치보다도 더 중히 생각하여야 함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모든 종교에 대한 무차별주의는 옳은가?」라는 의문을 제기하기까지 하며, 국가가 보장하는 종교의 자유나 교회 활동의 협조는 천주교회를 위하는 데만 국한된 말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강변했다. 물론 교회는 현실 정치상 이러한 주장의 관철이 어려우리란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천주교 우선의 원칙을 상기시킴으로써 신자 정치인은 종교 무차별주의를 배격해야 한다는 기본입장을 천명하고자 했다. 이와 같이 당시 교회의 일각에서 드러내고 있던 편협한 집단 이기주의적 주장은 그 성립 기반에 취약성이 있었던 장면 정권에 적지 않은 압력으로 작용하고 있었을 것이다.

사회참여의 이론적 근거

교회는 4ㆍ19혁명 직후부터 국가와의 관계를 올바로 정립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즉 교회는 자신이 『정치단체나 문화단체가 아닌 초자연의 신비를 가진 단체이며 국가도 그 국민의 도덕생활과 일상생활에 있어서 이 교회의 협력 없이는 완성될 수 없음』을 밝히고자 했다. 교회는 초자연의 복리를 지향하는 기구이지만 국가는 국리민복과 현세적 행복이라는 자연복리를 추구하는 기구이고, 공동선을 통한 인간 완성의 수단임을 강조했다. 그리고 그 결론으로 국가는 교회를 존중해야 하며, 종교가 정치에서 분리된다는 말은 신자가 정치에서 분리된다는 뜻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또한 가톨릭 신자의 공민적(公民的) 의무를 논하면서 신자는 교회의 가르침과 지시로부터 떠날 수 없음을 강조했다. 정치적 사회적 문제가 종교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까닭으로 신자들은 국가 발전을 위해 의견을 개진해야 한다고 했다. 또한 오스트리아 가톨릭 노동 청년회의 지도신부인 클로스트만의 글을 비롯하여 국가와 교회의 관계에 관한 여러 편의 계몽적 논설들이 당시의 교회언론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 글들의 논조는 교회와 국가는 구별되는 존재이나 신자가 어떤 특정된 정당에 관심을 둘 수 있고 지지할 수 있다는 방향으로 서술되고 있었다.

그리고 당시 교회에서는 교회의 사회참여 문제에 관해서도 깊은 관심을 표시하고 있었다. 교회가 정치 사회문제에 대해 논평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원칙을 당시의 교회는 신자들에게 일깨워 주고 있었다. 그리고 노동회칙 반포70주년을 기념하면서 사회정의를 배울 기회와 장소를 교회는 제공해야 될 것으로 생각했다. 가톨릭 노동 청년회에 대한 집중적 소개도 이러한 분위기에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가톨릭 운동이 내일의 인권의식을 낳을 전제가 된다는 것을 강조했다. 성직자의 사회참여를 촉구하면서, 『성직자의 보다 행동적인 사회참여야말로 세계적인 요구이며, 더구나 한국과 같이 평신자의 사회적 지위나 교리정도가 보잘것 없는 나라에서는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러한 이론적 배경의 제시와 함께 한국 교회 지도자들의 정치 사회 참여가 강화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당시 교회 언론에서는 가정교육의 강조나 저질문화의 규탄에서부터 국가 외교문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견해를 제시하기도 했다.

그리고 4ㆍ19 이후 혼란한 사회상을 바로잡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자유의 진정한 의미를 밝히고자 노력했으며, 혁명정신의 계승을 위해서 사회악 제거와 건전한 생활기풍 그리고 상호부조의 정신을 강조하면서 이를 통해 4ㆍ19정신은 생활한 국민정신의 기풍으로 살아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리고 가톨릭 신자이며 「대한의 아들 딸로서 역사의 주체적인 역할을 하자」고 강조하며, 1960년대 사회를 사는 한국 가톨릭 신자로서의 존재의식을 일깨워 주고자 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제 2공화국 아래에서의 한국 천주교회는 자신의 제한된 울타리를 벗어나 한국 민족 전체를 생각할 수 있는 성숙된 체험을 할 수 있었고, 민족의 현실문제에 대한 자각이 가능하게 되었다.

남은말

이 시기 교회는 민족의 현실문제의 해결에 대해 참여하고자 하는 의욕을 그 나름대로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민족문제였던 남북분단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는 종전의 반공주의적 자세를 의연히 견지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자세는 7ㆍ29 총선 때에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 이때 교회는 반공주의적 입장을 분명히 했고, 공산주의 동조자에게 투표하는 것은 죄가 됨을 신자들에게 일깨워 주었다. 그리고 당시 새롭게 부각되던 혁신 세력을 공산주의에 동조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의심하기도 했다. 또한 교회는 당시에 제기되었던 중립화 통일론을 「공산화의 첫 단계」라고 비난했다. 이와 같은 교회의 입장은 당시 사회에서 봇물처럼 터져 나오고 있던 각종 통일론 가운데 가장 전통적 색채를 띠고 있는 것이었다.

제 2공화국은 짧았다. 그러나 이때 교회는 새롭고 큰 경험을 하게 되었다. 교회는 제2공화국 아래에서 민족의 현실에 대한 정치적 사회적 참여를 체험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교회는 자신의 테두리를 벗어나 민족문제를 거시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훈련의 기회를 갖게 되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이러한 참여의 경험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 시기에 이르러 그 참여의 폭은 양적으로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확대되어 갔다. 그리고 이 「참여의 기억」은 「피의 기억」처럼 한국 천주교회의 주요한 전통을 이루어 주었다. 이 전통의 기틀이 제2공화국 아래에서 다져지고 있었으며, 이때 교회는 국가와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고자 모색했다. 그러므로 제2공화국 단계에서 전개된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규명하려는 작업은 한국 현대 교회사의 이해에 있어서 그 출발점이 된다.

조광 교수ㆍ고려대 한국사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