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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50주년 특별기획] 한국 천주교회의 어제 오늘 내일 39 - Ⅶ 현대 한국 가톨릭 교회와 국가 1

강인철ㆍ우리신학연구소 서울 연구실장
입력일 2012-03-27 수정일 2012-03-27 발행일 1996-08-25 제 2017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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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 충돌 속 「반공」의 모태 역 수행
일제 잔재 청산 소극적 태도 ‘옥에 티’
미 메리놀회 선교사들이 중간 매개체 역할
‘우익 세력의 연대와 통합’ 중점 정치에 참여
미 군정과 교회

미국의 임시 군사정부가 한국을 직접 통치하던 1945년 8월까지의 만 3년 동안 한국 천주교회와 군정 당국 간의 관계는 「우호적 협력」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기간 동안 교회와 군정 당국은 대소(對蘇) 전진기지로 역할 할 반공정부를 수립한다는 전후 미국의 한반도 구상과 같은 거시적 전략에서부터, 종교정책, 친일파 처리문제, 좌우합작문제, 유엔 감시하의 단독정권 수립문제에 이르기까지 거의 잡음 없이 긴밀한 협조관계를 유지했다. 따라서 이 시기에 한국교회는 극심한 좌우갈등 속에서 과도적인 군사정부가 그 소임을 다하고 우파 주도의 단독 독립정부에게 권력을 이양하는 방식으로 정국이 전개되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먼저 미 군정의 종교정책을 살펴보고, 다음으로 천주교회의 대응방식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미 군정의 종교정책

1945년 10월9일 미 군정은 법령을 통해 신앙을 이유로 차별을 발생케 하는 모든 조령과 명령을 폐지한다고 선언했다. 같은 맥락에서 역대 미 군정 장관들은 「종교자유의 수호자」로 자처했다. 서울교구장이었던 노기남 주교가 이 시기를 「종교적 평화시대」로 묘사했듯이, 천주교 지도자들 역시 미 군정의 종교정책을 적극적으로 환영했다. 동유럽과 중국, 북한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종교적 수난」, 그리고 특히 모든 종교들을 천황제 국가의 경쟁자로 간주하면서 종교 전반에 대한 억압을 강화한 일제시대 말기와 비교할 때 그렇게 부를 만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미 군정의 종교정책이 종교의 자유를 명실상부하게 보장했던 것은 아니다. 미 군정이 신앙을 이유로 차별을 발생케 하는 모든 조령과 명령을 폐지한다고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해 11월2일에는 군정 법령에서 아직 폐지하지 않은 구(舊)법령들은 존속된다고 규정했다. 이 때 존속되는 구 법령 가운데는 사찰령이 포함되어 있었다. 또 유교의 경우에도 경학원은 폐지되었지만, 미 군정 법령 제194조로 1948년 5월 공포된 「향교재산 관리에 관한 건」에 의해 유교재산에 대한 국가의 통제권은 계속 유지되었다. 반면에 그리스도교에 대해서는 상당한 특혜가 주어졌다. 군정의 많은 고위 관리들은 새로 건설될 나라가 그리스도교 정신에 입각해야 한다고 공공연하게 주장했는데, 예컨대 1947년 10월9일에 열린 초대 교황사절에 대한 환영식에서 군정 장관 대리였던 헬멕은 『건국은 그리스도의 정신을 기초로 하여야』한다는 연설을 했다. 다종교상황에서, 더욱이 그리스도교 인구가 총 인구의 1%도 차지하지 못하는 현실에서, 이 같은 발언이야말로 미 군정의 종교 차별적인 태도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밖에도 크리스마스의 공휴일 제정, 군정 사령관과 군정 장관에 의한 크리스마스 메시지 발표, 형목제(形牧制)등도 그리스도교에 대한 대표적인 특혜 조치들이었다. 그리스도교에 대해 거의 무제한의 자유와 각종 특혜를 제공하는 미 군정에 대해 그리스도교인들이 우호적이고 협조적인 태도를 취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이데올로기적 전환

해방으로부터 군정이 수립되기까지 약 20일 간의 권력공백상황에서 노기남 주교가 좌익이 주도하는 건국준비위원회 사무실을 방문하여 위원들을 격려하는 등 약간의 주저와 혼선도 없지 않았지만, 『시국을 침착히 정관하고 경거망동을 삼가라』는 해방 직후 노 주교의 지시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천주교회가 견지했던 기본적 태도는 한마디로 「관망」이었다. 그러나 미 군정이 수립되자 교회의 태도는 세속사회에 대한 「전면적인 개입주의」로 돌변했다. 이때 이른바 「가톨릭운동(Catholic Action)이 가장 중요한 사회참여 수단으로 대두되었는데, 일제시대와는 달리 가톨릭운동의 범위와 대상은 정치문제와 계급문제까지 포함하는 전면적인 것으로 재규정되었다. 해방 후의 천주교회는 「건국」과 「조국재건」의 슬로건이 지배했다. 반면에 해방 후 친일잔재 청산의 문제가 강력하게 제기되었을 때 천주교회는 전체적으로 소극적인 태도를 견지했고, 교회 안에서도 신사참배 문제나 친일 전력을 둘러싼 시비가 전혀 발생하지 않았다.

중앙집권적이고 수직적인 천주교 조직구조의 특성을 고려할 때, 지역 주교와 교황 및 교황 사절이 주어진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떤 행동처방을 내리는가가 특히 중요하다. 당시 교황이었던 비오 12세는 「반공의 지브롤터」로 불리울 정도로 맹렬한 반공주의자였다. 비오 12세는 1947년에 『도덕적 세계의 건설을 노력하는 전 세력의 단결과 도덕적 십자군의 건설을 요구』하는 트루만 대통령의 서신에 답하는 가운데, 『신앙의 재건과 세계평화 수립에 관하여 전적으로 협조할 것』을 약속함으로써 미국과 바티칸 사이의 동맹관계를 형성했다. 그는 남한에 독립정부가 수립되기도 전에 자신의 사절을 한국에 파견함으로써 사실상 분단정권을 승인했을 뿐 아니라 한국 독립선포식에 축전을 보내는 등 남한에 반공국가가 수립되도록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또 비오 12세에 의해 교황사절로 파견된 번(P.J.Byrne) 주교는 1947년 10월에 있은 한 연설에서 『가톨릭운동이야말로 공산주의를 격파할 수 있는 유일한 역량』이라고 주장하는 등 남한교회의 신자들이 반공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도록 자극하였고, 단독정부의 수립과 승인을 위해 영향력을 행사했다. 마지막으로 서울교구장이었던 노기남 주교 역시 반공정신으로 충만했고, 신자들에게 정치참여를 독려했다. 그는 1948년의 총선을 앞둔 시점에서 관할교구 교회들에 공문을 보내 총선의 성공과 함께 『공산주의적 세력 밑에 강제노동을 하고 있는 노동자들이 하루바삐 천주께서 주신 인권과 자유를 찾기 위하여, 또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공산주의자들이 회개하기 위하여』 성모께 특별한 전구를 간청할 것을 명했다. 또 노 주교는 단정수립을 「무신론과 유신론의 대립」에서 유신론이 승리를 획득한 것으로 간주했다.

당시 한국 천주교회가 꿈꾼 해방된 조국은 철저히 반공주의적이고 또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골간으로 한 것이었다. 천주교 지도자들은 장차 민주주의 정부가 수립되어야 한다는 전제 아래, 『가톨릭은 민주주의의 기초요 배토(培土)』이며 따라서 「민주주의의 선봉」임을 강조했다. 이 시기 천주교 신자들의 민주주의 이해는 1947년 7월호 「가톨릭 청년」지에 실린 글에 잘 나타나 있다. 『(공산주의와 민주주의의 양대 블록 중-인용자) 민주주의 블록이란 그 사상적 근원과 현실세계의 실력범주에 있어서 유사 이래의 연면한 그리스도교의 사상과 그 교화에 기원하는 것으로, 가혹한 육신세계의 생활투쟁 면에 현출되는 온갖 물질과 본능의 쟁투를 통하여 그가 사회국가형태에 반영되는 이념 내지 운영방법이 천주의 의사와 인간자유의 진실성에 입각해 있는 세력을 말하는 것이다』. 이 같은 인식에 기초하여, 천주교 신자들은 「모든 방면에」진출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함으로써 그리스도교 진리를 확증시켜야 한다고 거듭 주장되었다. 해방과 함께 공산주의의 영향력이 급속히 확장되고, 동유럽과 중국, 북한 등지로부터 전해지는 그리스도교의 수난이야기들이 흉흉하게 유포되는 객관적 상황에서 교회 지도자들은 「호교(護敎)」를 위해서라도 「반공」을 적극적으로 내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치참여 방향ㆍ방법

해방 직후 천주교회의 정치참여 방향은 반공주의, 일제잔재 청산에 대한 소극적 태도, 친미주의와 미국의 전후 한반도 구상에의 동조로 특징지워진다. 그렇다면 해방정국에서 천주교회가 선택한 정치참여의 방식은 어떠했을까? 그리스도교 지조자들이 정치영역에 참여하고 군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가능한 방식은 미 군정 고위 관료들과의 교류, 미 군정 고위 행정 관료로의 진출, 정당의 결성 혹은 기존 정당에의 가입, 입법의원이나 제헌의회 등 각종 선거에 대한 조직적 참여, 언론기관을 통한 참여, 정치적 성격을 강하게 띠는 시민사회단체에의 참여 등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 보다 직접적인 방식으로 교회 차원의 정치개입을 추진하기 위해 조직을 부분적으로 개편하거나 한시적인 조직을 설치하는 일도 있었는데, 각종 가톨릭운동 조직들이나 1948년 5ㆍ10선거에 임박해서 구성된 「시국대책위원회」가 그러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일제시대에 단 하나의 고등교육기관도 갖고 있지 못하여 인적 자원의 부족이 심각했던 탓에 미 군정의 행정 관료로 진출하는 일이 여의치 않았던 점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대부분의 방식들이 미 군정 시기에 시도되었다고 할 수 있다.

미 군정 고위 관료들과의 교류와 관련하여, 노기남 주교가 1945년 9월12일 미군 사령관 정치고문인 나이스터 준장의 부탁으로 미 군정 당국과 함께 일할 한국인 지도자 60명을 추천한 일은 좋은 출발의 신호였다. 노 주교는 9월 18일에는 하지를 예방하여 한국의 실정과 정치 지도자들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고, 9월26일에는 명동성당에서 미군 환영대회를 열게 되는데, 이 같은 일련의 접촉을 계기로 미 군정 당국과 급속히 가까워졌다. 이후에도 노 주교는 미군의 만찬회나 파티에 자주 초대되어 미 군정 고위 인사들과 교류를 계속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매주 명동성당의 주일미사를 통해 군정 장관인 아놀드 소장 등 미군 고위 장교들과 접촉했다. 이 과정에서 2차 대전 당시 미군 군종 사령관 겸 대통령 개인특사로 활동했던 스펠만(F. Spellman) 뉴욕 대주교나 주한 교황사절로 부임한 번 주교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특히 번 주교는 미 군정 기간 내내 한국에 상주한 거의 유일한 고위 외교관이었고, 더욱이 미국인이었다.

앞에서 「통역정치」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영미권 유학자나 영어구사능력 소지자가 우대받는 풍토에서 천주교회가 겪었던 인적 자원의 부족에 대해 언급했지만, 이로 인한 공백은 미국인 선교사와 고위 성직자들에 의해 성공적으로 메워졌다. 특히 미국인 선교사와 군정 당국의 긴밀한 협조관계는 국가권력에 대한 한국교회의 접근능력을 비약적으로 상승시켜 주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군정의 최고 책임자들이 선교사들과 정례적으로 만나 그들의 자문을 받았다는 점이다. 1946년 12월과 1947년 3월의 두 번에 걸쳐서 군정 당국은 개신교와 천주교의 모든 선교사들을 초청하여 하루 종일 회의를 했다. 여기서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한국어 능력, 한국인과 한국 상황에 대한 지식을 활용하여 군정을 안정되게 확립하는데 도움과 자문을 제공할 것을 요청받았다. 특히 두 번째의 회의 이후로 같은 해 9월까지 6개월 동안 러치 군정 장관은 매주 금요일 오전에 한 시간 동안 선교사들과 회의를 가졌다. 이 밖에도 경향잡지 1947년 2월호는 해방 후 재입국하기 시작한 미국 메리놀회 신부들이 「교회와 미 군정 사이의 여러 가지 주요 사무」를 맡아서 처리했음을 전하고 있다.

해방 직후에는 천주교 일각에서도 정당 결성이 논의된 바 있지만 실현되지 못했고, 그 대신 보수 우익정당인 한민당이 창당될 즈음에 노기남 주교의 적극적인 권유로 40여 명의 평신도 지도자들이 한민당에 가입했다. 한민당이 미 군정기 동안 사실상의 여당세력으로 기능하면서 이승만과 정치적으로 동맹관계를 형성한 사실에서도 시사되듯이, 이승만의 환국 이랴 노기남 주교를 비롯하여 윤을수, 김철규 신부 등 천주교회 최고 지도자들은 이승만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승만과 천주교회의 돈독한 관계는 1948년 5ㆍ10선거 당시 이승만이 자신의 선거구를 천주교 대표인 장면에게 양보할 정도로 잘 유지되었다. 이 밖에 신학교의 학장이었던 윤을수 신부가 극우적 노동운동세력인 노총을 대표하여 「국제자유노련」 결성식에 참여하거나, 명동성당을 우파 정치세력의 집회장소로 자주 제공한 데서도 천주교 측의 정치적 선택을 잘 읽을 수 있다.

1946년 10월 「경향신문」의 창간은 천주교 교회의 정치적 행동과 선택에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남로당 기관지를 발행하던 정판사를 미 군정청에서 반공 가톨릭이라 하여 불하해줌으로써 창간된 「경향신문」은 초기에 일시적으로나마 좌우합작이나 반민족행위자 처벌법 등 일부 쟁점들에서 교회의 공식입장과 다소 거리가 있는 입장을 표명하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강력한 반공이데올로기의 생산ㆍ전파기구로서의 역할을 다했다. 이 외에 「경향잡지」(1946년 8월), 「가톨릭 청년」(1947년 4월) 등의 교회 잡지들이 차례로 속간되었는데, 특히 가톨릭 청년은 속간 직후부터 정치사회적 쟁점들을 광범하게 다루면서 강력한 반공선전을 전개했다.

미 군정 시기에 천주교회 지도자들은 신자들에게 정치영역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도록 권장하고 요구했으며, 참여의 방향을 반공주의, 친미주의, 미국의 전후 한반도 구상에의 동조, 일제잔재 청산에 대한 소극적 태도 쪽으로 유도했다. 해방정국에서 천주교회의 정치적 참여는 「우익 정치세력과의 연대와 통합」으로 특징지워졌다. 천주교 지도자들은 이승만과 한민당 분파들과 특히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했으며, 실제로 미 군정기에 천주교회는 우익세력의 중요한 일부를 구성하고 있었다. 이 같은 정치적 연대관계는 미 군정과의 우호적 관계를 보장했을 뿐만 아니라, 정부 수립 후에도 상당 기간 동안 이승만 정권과 천주교회의 밀월관계를 가능케 했다.

강인철ㆍ우리신학연구소 서울 연구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