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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교회를 아십니까?] 16 본보 통해 보는 한국교회 그 때 그 모습

이윤자 취재국장
입력일 2012-03-26 수정일 2012-03-26 발행일 1996-08-25 제 2017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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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법과 교육정책에 있어
반 가톨릭 요소의 삽입을 감시
1952년 3월 25일

전화(戰禍)가 한창인 1952년 3월12일, 대구 남산동 주교관에서는 전란중 처음으로 연차 전국 교구장 회의가 열렸다. 동경의 교황사절(使節)막시밀리안 더 푸르스덴베르그 대주교가 임석한 가운데 열린 전국 교구장 회의에는 서울교구장 盧(노)주교, 대구교구장 최(崔)주교, 대전교구장 원(元)주교, 평양교구장 안(安)주교 등이 참석했다.

또 와병중인 전주교구장 김 주교 대리로 전주교구의 이요셉 신부가 참석하였고 전란중 피납된 광주와 춘천교구장 대리로는 광주교구의 현(玄)신부, 춘천교구의 오(吳)신부 등이 역시 대리로 참석하는 등 모두 7개 교구 대표 고위 성직자가 머리를 맞대고 한국 천주교회의 현안 문제들을 검토하였다.

그해 3월25일자 천주교회보는 1면 머릿기사로 전국 교구장 회의를 다루면서 『문서전교를 위해 중앙 출판국 설립 등 다양한 성과 거둔 주교회의 14일 완료』라는 부제(副題)를 붙였다. 참담한 전화가 아직 이 땅을 맴돌고 있는 와중에 한국 천주교회의 전국 교구장 회의가 열렸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눈길을 끌고있는 회의는 전란중이라는 취약점 속에서도 중요한 내용을 고루 다루고 있어 놀라움을 안겨준다.

주교회의 결의사항 중 일부를 살펴보자. △ 전란으로 말미암아 파괴된 교회 건물과 사업은 재침(再侵)의 위험이 없는 지방에서는 가급적 수복할것 △ 기도서와 교리문답 책 등은 어떠한 가톨릭 출판사를 막론하고 출판권의 허락을 얻은 후 발간할 것 △ 국가의 입법과 교육정책 및 교재에 관한 반 가톨릭적인 경향화를 방지하며 이를 감시하기 위하여 선정된 전문위원을 두기로 한다는 내용 등이 골자를 이루고 있다.

이밖에 금리에 대해 신자들이 받을 수 있는 이자 문제, 개신교 학교에서 수학하는 가톨릭 신자가 개신교 예배를 강요당할 때의 경우, 신자들의 이자 수입문제, 미사예물 문제 등을 다루고 있는 교구장 회의는 특별히 전국 가톨릭 중앙출판사 설립을 결정, 이를 위해 출판 포교 성 바오로회의 신부들을 초청한다는데 합의하고 있다.

교구장 회의는 또 『전쟁과 공산군의 침입시에 있어 복음과 교회정신에 따라 본당 신부는 관하(管下)신자가 잔류하고 있는한 일정한 주검의 위험이 있을지라도 그들과 함께 남아 있어야 한다』고 명시했다. 두 명의 교구장을 죽음의 행진으로 떠나 보내고 아직 생사조차 알 길 없었던 당시, 교구장 회의는 이 같은 합의를 통해 양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무수한 목자들의 의로운 선택에 결정적 가치를 부여해 준 셈이었다.

당시 교구장 회의에는 역시 피납되어 당시로서는 생사를 확인할 수 없었던 교황사절 방 주교 대신 동경의 막시밀리안 더 푸르스덴베르그 대주교가 동경에서 날아와 참석했다. 교황사절의 방한은 교구장 회의 참석과 더불어 교황의 위문을 대행하는 성격이었고 교황사절은 『굳은 신앙으로 시련을 인내하라』는 인사말씀을 통해 이 같은 자신의 직분을 확실하게 명시했다.

전화(戰禍)속에서도 역사는 이어지는 법. 1백여 년에 걸친 대박해 중에서도 용케 살아남은 한국 천주교회는 이해할 수 없는 이 전쟁의 참화속에서도 흐트러진 모습을 추스르고 가다듬으면서 자신의 역할을 재 정비하고 있었다. 전쟁 중의 교구장 회의라 생각하기에는 참으로 다양한 내용을 수렴하고 있는 당시 교구장 회의는 박해속에서 보다 싱싱하게 피어나는 꽃처럼 한국 천주교회의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주고 있다 하겠다.

이윤자 취재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