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성 김대건 신부 시성 12주년ㆍ순교 1백50주년 기념] 님의 발자취 따라 11 묻힌곳 미리내

입력일 2012-03-26 수정일 2012-03-26 발행일 1996-08-04 제 2014호 20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찢어진 몸뚱이 이제야 쉴 곳 찾았네
지금으로 생각하면 이제 갓 고등학교에 입학한 소년, 당시 17살의 이민식은 삶과 죽음의 틈바구니에서 밤을 낮 삼아 김대건 신부의 유해를 짊어지고 고행길을 나섰다.

잘려진 머리 가슴에 안고

그때가 1846년 10월, 김 신부의 잘려진 머리를 수의에 곱게 싸서 가슴에 안고 동체는 짊어진 채 그는 새남터를 나섰다. 현재의 흑석동을 지나 동작리 뒷산을 타고 남태령을 넘어 청계산 골짜기, 하우고개를 돌아 묘론이 고개, 판교를 거쳐 태재에 이르러 한숨을 돌린 그는 마침내 용인땅에 들어섰다.

큰길을 버리고 산과 어둠을 이용해 은밀히 움직인 그는 태화산 기슭의 퉁점, 드렝이 고개를 거쳐 은이마을에 도착했고 은이마을에서 미리내까지 험한 고개를 넘어 마침내 김대건 신부의 시신을 미리내에 있는 그의 선산에 모시게 됐다.

산 이와 죽은 이가 함께 휘적거리며 걸어온 고행의 길, 새남터에서 미리내까지 그 험한 길을 지금은 후손들이 쏟아지는 땀을 걷어올리며 걷곤 한다. 총 연장 90여km의 순례길, 지금은 자동차로 1시간을 조금 넘기면 닿을 수 있는 가까운 거리가 됐지만 많은 이들이 편안한 길을 마다하고 땡볕 속에 발길을 옮기는 것은 선조의 숨결을 한줌이라도 더 맡아보려는 마음일 것이다.

40일간 모래밭에 가매장

1845년 10월 12일,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 등 일행과 25척의 조그만 돛단배에 몸을 싣고 상해를 떠나 40여 일 만에 익산 나바위에 도착한 김 신부는 곧바로 서울로 올라와 용인 지방을 중심으로 6개월간 사목활동을 펼친다. 하지만 새로운 입국로를 개척하기 위해 이듬해 봄 조기잡이 배로 가장해 마포를 출발한 김 신부는 연평도를 거쳐 백령도에서 청국 어선과 접촉한 뒤 순위도로 돌아오는 길에 배의 징발 문제로 포졸들과 다투게 된다. 이 과정에서 포졸들은 그의 신분을 의심하게 되고 6월5일 등산 진영으로 체포해간다. 결국 신분이 탄로난 그는 해주 감영을 거쳐 서울로 압송되고 온갖 고초 끝에 9월16일 새남터에서 참수된다.

26세 젊은 나이에 순교한 김 신부의 시신은 40일 동안이나 포졸들의 감시를 받으며 모래밭에 가매장된 채로 새남터에 묻혀 있었다. 그러다가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서 교우들은 김 신부의 시신을 몰래 빼내었고 이민식이 미리내까지 그의 유해를 모셨던 것이다.

새남터로부터 미리내를 찾아가는 순례길은 하루 일정이면 충분하다. 남태령, 인덕원 사거리, 분당과 태재를 거쳐 눙원리와 왕산리를 지나 초부리에 도착하는데 여기서부터는 도보로 순례하기에 좋은 여건을 갖고 있다. 30여km 남짓으로 걸어서 8시간이 조금 넘게 걸린다. 이민식이 유해를 업고 달렸던 옛 경로는 군데군데 산길과 대여섯개의 고개를 넘어야 하는데 지금은 사람이 다니지 않아 잡목이 우거져 있고 험한 길도 꽤 있다.

미리내에 도착하면 말끔하게 정리된 넓은 광장과 주차장이 나온다. 산 중턱으로 멀리 103위 시성 기념 대성당이 보이고 널찍하게 포장된 길을 따라 오르면 성당을 지나 저만치 김 신부의 동상이 눈에 들어온다.

사방이 산… 유해모시기에 최적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깊숙한 골짜기, 이민식이 김 신부의 유해를 업고 와 몸을 숨기기에 딱 좋을 듯 싶은 천혜의 계곡이다. 후손의 정성이 깃든 거대한 성당이 먼저 감탄을 자아내지만 오히려 발밑의 한줌 흙과 녹색 풀잎들이 김 신부의 변치 않는 신앙과 순교정신을 말해주는 듯 하다.

동산을 곁으로 왼쪽으로 돌아드면 야트막한 언덕 중간에 하얗게 빛나는 조그만 경당이 나선다. 숙연한 마음으로 계단을 올라서면 가운데 제대, 그 발치에 액자에 넣어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행적가」(주재용 신부 지음)가 눈길을 끈다. 모두 18개 소절로 된 행적가는 김 신부가 신학생으로 발탁되어 조국을 떠날 때부터 시성에 이르기까지의 발자취를 절절한 심정으로 노래하고 있다.

1. 십오세 어린소년 안드레아는

모정에 싸인 조국 뒤에 버리고

멀고먼 이역풍토 만리타국에

십여년 오랜풍상겪으셨도다

8. 밤새껏 길걸으니 기갈심하고

혹독한 추위겹쳐 사경이건만

주막집 쫓겨나와 잘데없어서

깊은산 찬눈위에 몸을 던진다.

14. 십여년 그리웁던 모친안뵙고

상해를 목적지로 배를띄우니

관풍에 놀란물결 배를덮치나

성모님 보호입어 생명구했네

17. 금부에 이송되어 사십공초에

죽기로 결안내니 영광이로다

새남터 형장에서 생명바치고

안성군 미리내에 안장되도다

경당 왼편에는 자그마한 무덤 두기가 김 신부의 곁에 선 듯 자리하고 있다. 어머니 고 울술라와 이민식의 묘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한 자식을 먼 타국땅으로 떠나보내야 했던 어머니, 10여 년 만에 고국에 돌아왔어도 그 보고 싶었던 얼굴을 한번 쓰다듬지도 못하고 다시 보내야 했던 그 어머니, 그리고 천신만고 끝에 다시 만났지만 채 얼마 되지 않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아들을 보아야 했던 그의 가슴은 얼마나 천갈래 만갈래 찢어졌을까? 하지만 두 모자는 죽음으로 오히려 영원히 함께 있을 것임을 순례자들은 안다.

고 울술라는 아들이 순교한지 18년 후인 1864년5월17일 66세로 선종했고 교우들이 아들 묘로 올라가는 길 왼편에 모셨다가 1928년 경당이 완공되면서 현재의 위치로 이장됐다. 이때 이민식의 무덤도 함께 이장됐다.

이민식은 김 신부의 유해를 미리내에 모신 후 두려움 때문에 전라도로 잠시 몸을 피했다가 돌아와서 무덤을 보살폈다. 그후 자신의 집을 공소로 기증하고 사제가 되기 위해 늦게서야 라틴어를 배우다가 포기, 귀국해 종현성당에서 복사로 있으면서 교회 사업에 힘쓰다가 1921년12월9일 92세를 일기로 선종했다.

김 신부의 유해가 안장된 후 1901년5월 시복조사를 위해 유해를 발굴, 용산 신학교로 이장한 후 한동안 순례자들의 발길이 뜸해졌으나 1928년 경당이 축성되면서 다시금 발걸음이 잦아졌다. 1963년 수원교구 설립후 순교자 현양대회가 열리고 성지개발이 가속화되어 지금과 같은 대규모 성지의 면모를 갖추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