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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김대건 신부 시성 12주년ㆍ순교 1백50주년 기념] 님의 발자취 따라 10 순교지 새남터

리길재 기자
입력일 2012-03-20 수정일 2012-03-20 발행일 1996-07-07 제 2010호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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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사장 적신 성혈…복음화의 자양분
망나니 여덟번째 칼날에 순교
의연함 잃지 않고 참 사제직 실천
정확한 위치 고증안돼 아쉬움
“나는 천주를 위해 죽는 것입니다”

『나는 이제 마지막 시간을 맞이하였으니 여러분은 내 말을 똑똑이 들으십시요…. 나는 천주를 위하여 죽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내게 시작되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죽은 뒤에 행복하기를 원하면 천주교를 믿으십시요. 천주께서는 당신을 무시한 자들에게는 영원한 벌을 주시는 까닭입니다』

형장에서 남긴 김대건 신부의 마지막 유언이다.

1846년 9월16일 한양성밖 남쪽 한강변에 있는 일명「노들」혹은「사남기」(沙南基)라고도 불리던「새남터」에서는 거룩한 피 흘림이 있었다.

바로 한국인 최초의 사제 김대건 신부가「반역죄」란 죄목으로 나자렛 예수의 죽음을 똑같이 재현한 것이다.

한강변 백사장에는 많은 구경꾼들이 몰려들었다. 그 중에는 어떤 극악무도한 죄수가 처형당하는지 목을 길게 빼 두리번거리는 사내들도 있는가 하면 자신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긴 탄식에 놀라면서도 속내「예수 마리아」를 중얼거리며 이 죽음을 지켜보는 아낙들도 있었다.

시전(市廛)같이 왁자지껄하던 형장도 손을 등 뒤로 결박당한 죄수가 나오자 이내 조용해졌다.

구리빛 얼굴에 건장한 체구를 가진 젊은이였다. 유독 생기있는 눈을 가진 청년이어서 생면부지의 구경꾼들도 이내 그에게 호감을 가졌다.

웃옷이 반쯤 벗겨진 채 젊은이의 양쪽 귀에는 화살이 꿰뚫어 그대로 매달려 있었고 얼굴에는 회칠을 하고 있었다.

김대건 신부가 새남터에 도착하자 군사들은 모래에 깃발을 매단 창을 하나 박고 그 둘레로 죽 둘러서 원을 만들었다.

관장이 김대건에게 선고문을 소리내어 읽었다. 그 내용은 김대건 신부가 외국인과 교섭을 가졌기 때문에 사형선고를 내린다고 적혀 있었다.

그러자 김대건 신부는『내가 외국인들과 교섭을 한 것은 내 종교를 위해서였고 내 천주를 위해서였다』며『나는 천주를 위하여 죽는다』고 당당히 항변했다.

선고문이 다 읽혀지자 군사 둘이 나와 김 신부의 겨드랑에 장목(長木)을 꿰고 어깨에 멘 채 현장 둘레를 세 바퀴 돌았다. 그런 다음 김 신부의 무릎을 꿇리고 머리채를 새끼로 매 말뚝 대신 꽂아 놓은 창자루에 뚫린 구멍에 꿰어 반대쪽에서 그 끝을 잡아당겨 머리를 쳐들게 했다.

형 집행을 위한 준비가 진행되는 동안 김대건 신부는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냉정을 잃지 않았다.

새남터에 처음으로 끌려왔지만 김대건 신부에겐 왠지 낯설지 않았다. 이곳은 바로 주문모 신부와 앵베르 범 주교, 모방 나 신부, 샤스탕 정 신부 등 자신보다 조선에 앞서 온 선배 성직자들이 순교했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김 신부는 죽음의 형장인 이곳에서 오히려 평안함을 느꼈다. 위대한 선배들을 따라 순교의 은총을 입게 됐다는 위로와 자신의 피로 수백, 수천 배로 열매 맺을 이 땅의 사제성소를 하느님으로부터 약속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김대건은 자신의 목을 칠 망나니들에게도 의연함을 잃지 않았다.

『이렇게 하면 제대로 되었소. 마음대로 칠 수가 있겠소』『아니요. 몸을 조금 돌리시오. 이제 됐소』『자 치시오. 나는 준비가 되었소』

망나니와 김대건 신부 사이에 오간 말이다.

12명의 망나니들은 김대건 신부 주위를 돌면서 제각기 그의 목을 내리쳤고 여덟 번째 칼날에 김 신부의 머리가 떨어졌다. 위대한 죽음이었다.

그의 거룩한 피는 이미 이 땅의 흙을 조찰히 씻어냈고, 그 피를 양분으로 먹고 자란 이 땅의 사제를 금년까지 2천5백여 명이나 배출시켰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김대건 신부가 순교한 새남터의 정확한 위치는 확인할 수 없다.

전래돼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새남터가 현재 철도청이 기관고로 사용하고 있는 부지라는 주장과 원효로 4가 부근이라는 의견도 있다.

이에 한국 천주교회는 고증이 어려운데다 그 부지의 확보마저 어려워 새남터 근방으로 추정되는 서울 용산구 서부 이촌동 199번지의 땅을 확보, 1950년 순교 기념지로 지정했다.

이후 1956년 이곳에「가톨릭 순교 성지」라는 기념탑이 세워졌고, 1981년 한강본당에서 새남터본당이 분리, 독립돼 1984년 새남터 대성전이 건립됐다.

한국 순교복자성직수도회가 관할하고 있는 새남터 대성전에는 매일 김대건 신부를 비롯한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을 현양하는 미사가 봉헌되고 있다.

현재 새남터 대성당 제대 옆에 모셔져 있는 김대건 성인의 유해는 순례자들을 생생한 당시 순교의 현장으로 안내하고 있다.

한 점 뼈 조각으로 자신의 순교지를 지키고 있는 김대건 신부는 마지막 서한을 통해 신자들에게 남겼던 당부를 오늘 우리에게도 전하고 있다.

『사랑을 잊지 말고 서로 참아 받아 돌보고 불쌍히 여기며 주님께서 가련히 여기실 때를 기다려라. 내 죽는 것이 너희 육정과 영혼 대사에 어찌 거리낌이 없으랴. 그러나 천주 오래지 않아 나보다 더 착실한 목자를 상으로 보내실 것이니, 부디 서러워 말고 큰 사랑을 이뤄, 한 몸같이 주님을 섬기다가 사후에 한가지로 영원히 천주님 앞에서 만나, 길이 누리기를 천만천만 바란다』

김대건 성인 순교 1백50주년을 맞아 성인의 축일인 7월5일을 전후해 성인의 순교정신을 현양하기 위해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 하루 일정으로 순례를 떠나는 것도 좋을 듯하다.

순례 코스로는 김대건 신부의 두개골을 비롯한 유해가 안장돼 있는 서울 혜화동 대신학교 성당에서 출발, 명동대성당 지하성당-서소문-당고개-새남터 성지 순으로 도보 순례를 해볼 만하다.

또 지하철 4호선을 이용해 이 코스대로 순례할 수도 있다. 역시 서울 혜화동 신학교에서 출발, 명동역에 내려 명동대성당으로 순례한 후, 다시 서울역에서 서소문 성지를 순례하고, 용산역에 내려 새남터로 가면 된다.

지하철을 이용할 경우 시간적 여유가 많으므로 2호선 합정역에서 절두산 성지를 함께 순례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

리길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