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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순교혈사] 55 유배형으로 순교기회 잃었다가 73세 나이로 순교한 이일언 (욥)

차기진·한국교회사연 연구실장>
입력일 2012-02-20 수정일 2012-02-20 발행일 1997-11-23 제 2079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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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간 옥살이…갖은 모욕ㆍ학대 참아내
슬퍼하는 자식들에 훌륭한 교우되길 당부
어느 박해 때고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때로는 별다른 이유 없이 석방되거나 유배형을 받음으로써 순교할 기회를 놓친 교우들이 종종 기록에 나타난다. 특히 유배 신자들 가운데는 유배지에서 사망한 경우도 있고, 유배지 인근에 복음을 전함으로써 그 지역의 사도가 된 경우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해배된 이후 다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함으로써 혈세의 영광을 얻게 된 순교자도 있는데, 이일언(욥)이 바로 이러한 경우이다.

충청도 홍주 땅 대벌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난 욥의 관명은 「태문」으로, 일찍이 천주교에 입교한 부친 점손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수계생활을 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서른이 좀 넘었었다. 그러나 입교한 지 얼마 안 되어 일어난 1801년의 신유박해로 인해 고향에서 체포되었고, 배교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내 경상도 안의 땅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유배지에 이른 뒤 욥은 그곳 관장과 아전들에게 잘못 보인 탓에 다시 옥에 갇히게 되었다. 당시의 형률에는 유배자를 옥에 가둘 수 없게 되어있었으니, 이는 안의 관장이 제멋대로 명령을 내린 때문이었다. 게다가 관장은 하루나 이틀에 한 끼만 음식을 주도록 하였고, 어느 때는 온종일 물도 주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욥은 10년 동안을 옥에 갇혀 생활하면서 갖가지 모욕과 학대를 받아야만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 안에 강하게 자리 잡고 있던 신앙에 대한 열정은 모든 것을 참아내도록 해주었으며, 이러한 인종은 마침내 편견을 가지고 있던 관장의 마음을 움직여 그는 어느 개인 집에서 연금 생활을 하게 되었다. 또 1815년에는 아내가 안의로 그를 찾아와 1826년 5월까지 함께 생활할 수 있었다. 이후 연금 생활에서 풀려난 욥은 전라도 임실의 대판이라는 곳에 정착하여 다시 마음 놓고 수계생활을 하였다. 이때부터 교우들은 유배 생활을 하던 곳의 이름을 따서 그를 「안의 이씨」라고 불렀다.

임실 땅에 정착한 지 얼마 안 되어 정해박해가 발생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욥의 아내는 남편에게 피신을 권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서 눈물을 펑펑 쏟으며 스스로를 한탄하였다. 이에 그를 찾던 사람들이 이유를 물으니, 『전에 순교할 기회를 놓치고 귀양을 간 것이 분하였는데, 이제 이런 궁벽한 시골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천주를 위해 목숨을 바칠 기회조차 오지 않는 것이 기막혀 운다』고 대답하였다.

이처럼 포졸들이 자신을 체포하러 오지 않음을 원망하던 그의 순교 의지는 마침내 하늘에 전달되었다. 사흘 후 전주 포졸들이 어떻게 소문을 듣고 왔는지 임실로 들이닥쳐 그를 체포한 것이다. 이때 다른 가족들의 놀라움과는 달리 욥은 기쁨을 이기지 못하면서 아주 감사하는 마음으로 순순히 포졸들을 따라 나섰다.

전주 감영으로 압송되자마자 곧 문초가 시작되었다. 특히 감사는 그의 전력을 알고 나서는 여느 때보다 더 심하게 매질을 하도록 하였고, 며칠이 지나도 그의 마음이 요지부동인 것을 알고는 옥에 가두어 두도록 하였다. 당시 형리들은 욥의 키가 작고 외모가 보잘 것이 없었으므로 처음에는 「얼마 안 가 배교하겠지」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가 꿋꿋이 형벌을 참아내면서 굳은 신앙심을 나타내는 것을 보고는 『우리가 외모를 보고 잘못 판단하였군. 이 사람은 진짜 천주교의 우두머리가 틀림없어』라고 하면서 감탄해 마지않았다고 한다.

그 후 욥은 천상에 오를 동료들과 함께 다시 오랜 옥살이를 해야만 하였다. 그러다가 1839년에 기해박해가 일어나서야 비로소 사형 판결을 받고 그토록 바라던 처형일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날 그의 자식들이 울면서 처형장으로 따라오자 욥은 마지막으로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하였다. 『왜들 우느냐, 나는 마침내 천국으로 떠나가니, 내 행운을 기뻐해야 할 것이다. 너희 아버지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죽는 것을 즐겁게 받아들이고, 너희들도 부디 훌륭한 교우가 되도록 노력하거라』 그런 다음 형장으로 정해진 장터에서 칼날 아래 목숨을 바치니, 이때 그의 나이 73세였다.

차기진·한국교회사연 연구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