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신 순교혈사] 54 정해박해 순교자 이성지ㆍ성삼 형제와 김도명

차기진·한국교회사연 연구실장
입력일 2012-02-20 수정일 2012-02-20 발행일 1997-11-09 제 2077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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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지ㆍ성삼 - 가난한 신자 돌보며 교리책 배포 
김도명 - 회유ㆍ형별에도 굳건히 신앙 증거
을해박해가 경상도 교우촌을 유린한 뒤에도 국지적인 박해는 계속되어 1817년에는 충청도 덕산의 배나드리(현 예산군 삽교읍 용동리) 교우들이, 1819년에는 조숙(베드로)과 권데레사 동정 부부가 순교하였다. 이어 1827년에는 전라도에서 새로운 검거 선풍이 일어나게 되었으니, 이것이 이른바 정해박해이다.

전라도지역에서는 오랫동안 평온한 시기가 계속되면서 새로운 교우촌이 형성되었고, 신입 교우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악마가 이 평온을 깨트리고 말았다. 1827년 2월경, 곡성의 덕실(현 곡성군 오곡면 미산리) 교우들이 체포된 것을 시작으로 순창ㆍ임실ㆍ장성ㆍ고산 등지에서 수많은 교우들이 체포된 것이다. 이 때 대부분의 교우들은 배교하고 석방되었으나, 몇몇 그리스도의 용감한 용사들은 끝까지 신앙을 증거함으로써 다른 이들의 모범이 되었다.

그 중에는 사형 선고를 받기 전에 다른 동료들보다 먼저 옥중에서 순교한 이들이 여럿 있었는데, 바로 이성지(세자 요한, 일명 유진)와 그의 셋째 아우 이성삼(사도 요한, 일명 유정), 김도명(안드레아)이 그들이다.

이성지(요한)와 이성삼(요한) 형제는 충청도 덕산의 높은 뫼(현 예산군 고덕면 몽곡리)에서 태어나 장성한 뒤에야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이때부터 그들 형제는 계명을 지키는 데만 열중하였고, 동생 이성삼은 교리서적을 필사하여 교우들에게 팔기도 하고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고향에서는 미신 행위에 참석해야만 하였으므로 수계 생활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이어 그들 형제는 집안 식구들과 함께 산중으로 들어가 살기로 결심하였다.

물론 산중에서 여러 식구가 함께 생활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이내 그들은 굶주림과 추위를 맛보아야만 하였고, 아직 외교인이던 부친은 이러한 그들의 행위를 크게 나무라면서 천주교를 욕하곤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제의 열심은 끝내 부친을 회개토록 하여 사망하기 직전에 천주교에 입교시킬 수 있었다.

부친이 사망한 뒤 요한 형제는 전라도 고산 땅으로 이주하여 가난한 교우들을 보살펴 주거나 교리서적을 나누어 주는 일에 앞장섰다. 그러다가 1827년의 박해로 온가족이 함께 체포되어 전주 감영에 갇히고 말았다. 이 곳에서 그들 형제는 충청도 면천 출신인 김도명(안드레아)을 동료로 맞이하였는데, 그는 신자 가정에서 태어나 신앙생활을 하다가 훗날 순창으로 이주하였고, 이 곳에서 체포되어 전주 감영으로 오게 되였다.

전주 감영에는 그들 외에도 여러 교우들이 있었으며, 감사는 그들을 배교시키려고 형벌을 가하면서 갖가지로 회유하였다. 이 때 이성지는 팔이 어긋나도록 심한 형벌을 받는 가운데서도 신앙을 증거하면서『저도 얼마든지 부모님을 공경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위패와 같이 산에서 잘라온 나무 조각으로 만든 것을 어찌 부모님으로 공경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항변하였다.

또 그의 아우인 이성삼은 교우들에게 천주교 서적을 나누어 준 것이 드러나 더욱 심한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고, 김도명은 교우들을 고발하기를 거부하면서 사형의 위협 속에서도 결코 배교하지 않았다.

어떤 기록에는 이성삼만은 끝까지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는데, 이성지와 김도명은 잠시 마음이 약해진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끝내 마음을 다잡고 다시 신앙을 증거하였으며, 되풀이하여 옥에 갇혔다가 불려나가 형벌을 받곤 하였다. 그러던 중 가장 굳건하게 신앙을 증거한 이성삼이 혹독한 고문의 여독으로 인해 1827년 9월 14일 옥중에서 먼저 순교하고 말았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33세였다.

이후에도 이성지와 김도명은 옥에 갇혀 있으면서 오랫동안 시달림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러다가 1832년에는 김도명이 먼저 50여 세의 나이로 옥사하였으며, 1835년 4월 11일에는 이성지가 58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이처럼 그들은 칼날 아래 순교하고자 했던 원의를 이루지는 못하였으나, 옥중에 남아 있던 그의 동료들은 이후 진정한 순교의 영광을 얻게 되었다.

차기진·한국교회사연 연구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