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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전한 신앙생활을 해치는 운동과 흐름] 2 시한부 종말론

자료제공=주교회의 신앙교리위원회
입력일 2012-02-20 수정일 2012-02-20 발행일 1997-10-26 제 2075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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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론은 희망의 메시지  미래 위한 새로운 삶 촉구
숫자를 비롯한 이러한 상징적 표현은 올바른 해석을 요구한다. 시한부 종말론자들은 이러한 것들을 잘못 해석함으로써 그리스도교 종말론을 본질적으로 오해…….

오늘날의 심각한 환경오염 문제는 인간 스스로 생태계를 파괴함으로써 인류의 파멸을 앞당길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시한부 종말론의 주장은 성서나 사적 계시를 잘못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어떻든 성서와 계시를 바탕으로 삼고 있기에 그리스도교인들 역시 흔들리고 있다. 본질적으로 그리스도교 종말론은 사람들을 위협하고 불안하게 하려는 목적을 지닌 것이 아니다. 오히려 미래에 대한 희망의 메시지이다.

물론 다니엘서나 요한 묵시록 같은 성서는 천체의 흔들림, 괴물의 출현 등 무시무시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묵시문학적 표현은 그 당시 박해 받고 있던 그리스도인들의 희망이었다. 억눌려 있는 사람들에게 세상이 뒤바뀐다는 것은 희망이기 때문이다. 또 억압 받고 있는 사람들은 암호나 은어로 말하는 일에 익숙하다.

숫자를 비롯한 이러한 상징적 표현은 올바른 해석을 요구한다. 시한부 종말론자들은 이러한 숫자나 상징적 표현을 잘못 해석함으로써 그리스도교 종말론을 본질적으로 오해하고 있다.

예컨대 시온산의 14만4천 명 (묵시 14,1 참조)은 구원 받을 사람의 실제적 숫자가 아니다. 144는 완전을 뜻하는 12의 제곱이다. 말하자면 하느님은 온 세상의 모든 민족을 구원하시고자 한다는 의미이다.

6일 간의 창조(창세 1,1~2,4 참조) 역시「주님께서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2베드 3.8)라는 말씀을 적용하여 그 하루를 1천 년으로 계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와 같은 계산으로 성서 역사가 6천 년을 끝맺음 해야 한다 라든가, 아담과 하와가 4천 년에 출현했다는 주장은 터무니 없는 이야기다.

예수께서도 묵시문학적 표현을 이용하여 세상의 마지막 날을 묘사하고 계시지만 (마르 13장 참조), 여기에는「하느님나라」와 그 기쁨을 놓치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초대가 담겨 있다. 또 성서에는 묵시문학적 표현 이외에도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이 하느님에 의해 완성되리라는 희망과 더불어 비유적이긴 하지만 그 완성된 하느님 나라의 기쁨을 종말론의 내용으로 담고 있다.밭에 묻힌 보물을 발견한 것과 같은 기쁨, 혼인 잔치와 같은 흥겨움, 누룩과 같은 풍성함, 새가 깃들이는 겨자나무와 같은 아늑함 등 다양하게 묘사되고 있다.

그리스도교의 종말론의 내용을 이루고 있는「그리스도의 재림」이나「예수 그리스도께서 최후의 심판관」이시라는 사실도, 인간을 위해 돌아가시기까지 인간을 사랑하시고 죄를 용서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와 그로 인한 우리 미래의 희망을 표현하고 있다.

「죽은 자의 부활」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더불어 하느님께서 의로운 이들을 죽음에 버려두시지 않으신다는 그분의 정의와 권능을 드러내는 희망의 표현이다.

성서는 결코 세상 끝날이 언제 어떻게 일어날 것인지를 미리 알려주는 점술 서적이 아니다.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

오늘날의 심각한 환경오염 문제는 인간 스스로 생태계를 파괴함으로써 인류의 파멸을 앞당길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스도교 종말론은 언제든지 파멸할 수 있는 가능성 속에서조차 하느님의 권능과 자비를 희망하며 지금 이 순간부터 인류가 죄악의 생활을 버리고 좀 더 나은 미래를 향해 새로운 삶을 살도록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자료제공=주교회의 신앙교리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