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가톨릭 문화유산 순례] 4. 안성 구포동성당

리길재 기자
입력일 2012-02-16 수정일 2012-02-16 발행일 1997-08-10 제 2065호 7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토착화 양식 잘 반영한 한국-서양 절충식 성당
바실리카식 양식 본 따 외관을 단순하게 지어
전례에 매우 충실한 건축물 
경기도 기념물 제82호 지정
현재 경기도 기념물 제82호로 지정, 보존되고 있는 수원교구 안성 구포동성당(과거 안성본당).

경기도 안성군 안성읍 구포동 80번지에 위치한 구포동 성당(주임=이상돈 신부)은 경기도 지역 초기 본당 중의 하나로 1900년 10월 19일 충청도 공세리 본당으로부터, 설립됐다.

초대 본당 주임으로 부임한 공베르 신부는 여러 해동안 성당 신축기금을 모아 1922년 3월 성당 건립을 착수했다.

프와넬 신부의 설계를 토대로 중국 기술자에 의해 지어진 안성 구포동 성당은 그 해 10월 4일 완공, 서울교구 보좌 주교로 있던 드브레 주교 집전으로 축성식을 봉헌했다.

서양 초기 바실리카식 교회 양식을 본 따 외부의 허식적인 장식을 피하고 단순한 외관으로 처리한 구포동 성당은 초기 성당에서 나타나는 토착화 양식을 잘 반영한 한양(韓洋) 절충식 성당이다.

성당 공사에 사용된 기와와 돌 등은 안성군 보개면 동안리에 있던 유교 강당의 헌 자료를 이용했고, 목재는 압록강변과 서산 지방의 것을 사용했다. 구포동 성당을 1955년에 고딕식 벽돌조로 종탑 부분을 증축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구포동 성당은 한식 중층구조로 정면 5칸, 측면 9칸의 장방형이나 작은 익랑이 있는 전형적인 바실리카식 라틴 십자형 평면으로 설계됐다. 내부열주에 의해 신랑과 측랑의 구별이 뚜렷하고, 측랑 공간은 툇간으로 천장이 낮고 상단에 갤러리를 두고 있다.

외벽은 또한 화강석 기초 위에 창대 아래까지는 돌로 쌓고 목조 심벽 구조인 상부는 프라스터로 마감돼 있다.

건축 전문가들을 구포동 성당의 경우 라틴 십자형 평면과 3층 벽면 구성, 서양식 내부장식 등으로 가톨릭교회의 전례 공간에 매우 충실한 성당 건축물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경기도 안성 지역에 복음이 전파된 것은 박해시대로 1866년 병인박해를 전후해 이웃의 죽산과 안성군 소촌만면의 모산리와 명당리, 서리면의 계촌 등지에 신자들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이들 중 몇몇은 체포되어 순교했다.

기록에서 이 지역 교우촌이 처음 나타나는 것은 1883년으로, 당시 충청도와 경기도 남부 지역을 담당하던 두세 신부가 그 해 안성 지역을 방문, 「바울 공소」를 설립했다.

안성 지역의 신자들이 본당 설립 운동을 펴게 된 것은 뮈텔 주교가 이 곳을 방문한 뒤였다. 당시 이 지역의 신앙 중심지는 바울 공소와 질구비 공소, 갈전리 공소 등지였으며, 안성읍에는 한 가족만이 거주했다고 한다.

그러나 장차 설립될 본당이 발전하기 위해선 읍내에 성당과 사제관이 건립되어야만 했고, 이에 신자들은 드비즈 신부와 협의, 구포리에 있던 현재의 성당 터를 매입, 그 자리에 기와집 21칸을 성당으로 개조한 다음 1900년 9월 드비즈 신부의 집전으로 낙성식을 가졌다.

이렇게 본당 설립의 기본 여건이 갖추어지자 드비즈 신부는 즉시 뮈텔 주교에게 서한을 보내 본당 설립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그 결과 1900년 10월19일자로 안성 본당이 설립되고 초대 주임으로 공베르 신부가 임명됐다. 공베르신부는 1909년 1월 현 안법 고등학교의 전신인 사립 초등학교인 「안법학교」를 설립했고, 1919년 3ㆍ1운동 때에는 만세를 부르다 왜경에게 쫓기던 사람들을 성당 안으로 들여 보내고, 사제관에는 프랑스 국기를 게양한 뒤 치외법권을 주장, 왜경의 성당 진입을 막아 주민들을 보호하기도 했다.

현재 구포동 본당은 본당 설립 1백주년을 앞두고 백주년 기념사업 준비에 한창이다.

리길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