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신앙의 명가를 찾아서] 6 순교자 방영창(안토니오)의 가계

리길재 기자
입력일 2012-02-14 수정일 2012-02-14 발행일 1997-07-13 제 2061호 16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5대째 내려오는 “기도하는 가정”
병인박해 때 자리개질 당해 순교
4·5대 손에서 수녀 3·신부 2 배출

자리개질은 군인 네 명이 죄수의 팔 다리를 각각 하나씩 잡고「어영차」하는 구호 소리에 맞춰 높이 들었다가 세차게 돌다리 위에 매쳐 단 번에 머리를 박살내는……

대전교구 홍보국장 방윤석 신부 집안은 5대째 내려오는 신앙의 명문이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해 문헌과 구전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신앙의 내력이 고조부 대부터인지 그 윗대 조상들이 신앙을 가졌는지는 정확히 모르고 있다.

방 신부의 고조부는 1866년 병인박해가 발생하자 해미에서 순교한 방영창(안토니오)이다.

자칫 무명 순교자로 이름조차 세상에 알려지지 않을 뻔한 순교자 방영창의 집안은 박해시대 신자 가정이 얼마나 풍비박산 날 수 있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대전교구 방윤석 신부 집안

온양 방씨로 부인과 7살, 4살 난 두 아들과 내포지방 양촌(현 충남 예산군 고덕면 상궁리)에서 농사를 짓던 방영창은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1866년 11월 체포돼 해미성 서문 밖 하수구 돌다리 위에서 자리개질로 순교했다.

자리개질은 군인 네 명이 죄수의 팔다리를 각각 하나씩 잡고「어영차」하는 구호 소리에 맞춰 높이 들었다가 세차게 돌다리 위에 매쳐 단 번에 머리를 박살내는 잔인한 사형 방법이다. 이렇게 순교한 해미 순교자들은 성 밖에 아무렇게나 쌓였다가 개천에 버려졌다.

당시 자리개질 현장의 하수구 돌다리는 지금 서산본당 정문 앞에 순교돌로 세워져 있으며 아직도 순교자들의 피가 돌 속에 배어 있어 붉은 흔적이 남아 있다.

방 신부의 고조 할머니인 순교자의 부인 마리아(이름은 전해지지 않음)는 남편이 체포된 며칠 후 포졸 둘이 찾아와「네 남편은 자리개질로 죽었다. 시신을 찾고 싶으면 돈을 내 놓아라. 우리가 건네 주겠다」고 말해 순교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돈은 고사하고 남편이 체포된 직후「천주학쟁이」란 이유로 머리채를 잡힌 채 마을 돌림을 당한 마리아는 포졸을 그냥 돌려 보내고 아이들이 잠든 한밤중에 한티고개를 넘어가 남편의 시신을 찾기 위해 해미 수구문에 널려 있는 시신을 더듬으며 날밤을 새웠다고 한다.

집안 구전으로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마리아가 야밤에 두려움에 떨면서 수백 구의 시신을 더듬었으나 얼굴이 모두 뭉개졌고 몸과 옷은 모두 퍼지거나 찢겨 피범벅이 돼 도저히 분간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후 마을에서 추방 당한 마리아는 문전걸식을 하며 이 마을 저 마을 떠돌았으며 3~5년 주기로 돌던 말라리아(염병)로 7살 난 장남을 잃고 자신도 젊은 나이에 병들어 죽었다고 한다.

족보도 없이 후손들 사이에 성과 본관 세례명만 전해져 오던 순교자 집안은 일제 식민지 정책에 따라 만들어진 집안 호적에 전호주로「방영창」이란 이름이 기재돼 순교자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 방윤석 신부의 가계보도 순교자 방영창을 중시조로 해서 최근에 새로 작성됐다.

마리아는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고 마을에서 추방되는 몸이 됐지만 신앙만은 온전히 간직한 채 자식들에게 물려 줬다. 그 증거로는 이들 집안의 신앙도를 보면 충분히 알 수 있다.

매일 저녁 1시간 넘게 가족 기도

구전에 의하면 마리아는 일생동안 매일 묵주기도 5단을 바쳤으며 기도 중 분심이 들면 처음으로 되돌아가 다시 시작, 분심 없이 5단을 다 바칠 때까지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고 한다. 마리아는 또 기도를 바칠 때 항상 커다란 목침을 가슴에 괴어 고통을 느끼면서 기도했다고 한다.

방 신부의 증조부 즉 순교자 방영창의 4살 난 아들이었던 방춘화(바오로) 역시 매일 가족들을 모아 놓고 기도를 바쳤고 저녁기도 때는 묵주 기도와 연도, 죽음을 예비하는 기도, 가정을 위한 기도, 친척을 위한 기도, 성직자를 위한 기도, 성교회를 위한 기도 등을 연속하여 한 시간 넘게 했으며 기도 자세도 두 무릎을 꿇고 느린 속도로 차근차근 한 자도 틀림없이 바쳤다고 한다.

이렇게 전해진 방 신부 집안의 신앙 내력은 요즘도 가족끼리 저녁기도를 봉헌하고 마침 기도로 꼭「성모가」를 노래로 부르고 있다.

방윤석 신부는 이에 자신은「부모님이 물려 주신 신앙으로 사제 생활을 하는 것이지 신학 지식은 단지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확신했다.

손이 귀해 할아버지 대까지 독자로 이어져 오다 아버지 대에서 5남 2녀로 가족이 불어나자 방 신부의 집안에도 사제, 수도자들이 배출되기 시작했다.

방 신부의 고모인 방재현(골롬바) 수녀가 인보성체회에서 수도 생활을 하고 있으며 아버지 방재회필립보)씨는 신학교에 들어 갔다가 도중에 나왔다고 한다.

또 대고모 방달운(루시아)씨의 막내딸인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김 미리암 수녀와 현재 속초 교동본당 전교수녀로 있는 사촌 여동생 방주석(로엘) 수녀가 있다.

외삼촌도 신부……교포사목 중

순교자 방영창 후손으론 처음으로 사제가 된 방윤석 신부에 이어 동생 방경석(알로이시오) 신부가 지난 1990년 사제로 서품됐고, 외삼촌 김영곤 신부도 현재 교포사목 중에 있다.

「매년 구정과 추석이면 집안 식구들이 모여 여사울에서 간양곶, 양촌을 거쳐 한티고개를 넘어 해미 성지까지 순례를 한다」는 방윤석 신부는「해미 성지를 찾을 때마다 안장돼 있는 무명 순교자들의 유해 중 하나는 할아버지 뼈일 것이라는 생각에 가슴이 뭉클해진다」고 말했다.

순교자들의 삶에 유독 관심을 보여 청양 줄무덤 성지를 개발하기도 한 방윤석 신부는 「몸으로 신앙을 살았던 순교자의 후손으로서 조상에게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을 살아 가고자 노력하고 있다」고 자랑스러워 했다.

리길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