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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명가를 찾아서] 5 순교자 윤유일(바오로)의 가계

리길재 기자
입력일 2012-02-13 수정일 2012-02-13 발행일 1997-06-01 제 2055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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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때문에 집안이 “풍비박산”
동생 유오 점혜 등 5명 순교
땅 기증 개신교 신자 후손 곧 개종

현재 수원교구(교구장=김남수 주교)에서 추진하고 있는 신유박해 순교자 시복시성운동의 대표적 인물이 바로 윤유일(바오로)이다.

또한 수원교구가 교황청에 청원한 시복시성 대상자에는 윤유일의 동생인 윤유오(야고버)와 사촌 누이 윤점혜(아가다), 윤운혜(마르타), 운혜의 남편 정광수(바르나바)가 있다.

◆부친과 숙부는 유배

아울러 윤유일의 부친 윤장과 숙부 윤현도 신앙 때문에 각각 임자도와 해남으로 유배됐다.

윤유일 가계는 이처럼 순교자 집안이요 앞으로 전 세계 신자들이 공경할 복자와 성인들을 배출할 신앙의 명가이다.

윤유일(1760∼1795)은 파평 윤씨 윤장의 장남으로 경기도 양근의 한강개(한강포)에서 태어났다.

권철신(암브로시오)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익힌 윤유일은 권일신(프란치스코 사베리오)과 정하상의 부친 정약종(아우구스티노)에게서 교리를 배우고 입교했다.

윤유일은 아직 입교 전 예비신자로 있던 1789년 당시 가성직제도에 의문을 느낀 초기 교회 지도자들에 의해 이 문제를 북경 주교에게 문의할 북경 파견 밀사로 선정됐다.

윤유일은 권일신과 이승훈의 편지를 갖고 북경에 가 북당을 찾았으나 예수회 신부들이 해산한 후여서 남당에 있는 구베아 북경 주교를 알현, 조선 교회 탄생을 알렸다.

북경에 머무는 동안 윤유일은 1790년 2월 9일 라자리스트인 로(Rsux)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구베아 주교로부터 견진성사까지 받고 귀국했다.

이때부터 북경 파견 밀사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한 윤유일은 1790년 5월27일 다시 북경으로 가서 구베아 주교에게 성직자 파견을 요청했고, 주교의 사목서한을 받아 와 한국 교회에 전했다.

◆주문모 신부 영입의 일등공신

초기 한국 교회 지도자들과 윤유일의 노력으로 주문모 신부를 영입하는 결실을 맺게 됐고 윤유일은 이 땅에 최초로 가톨릭 성직자를 모셔 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주문모 신부의 입국 사실이 배교자 한영익에 의해 조정에 발각되자 윤유일은 최인길, 지황과 함께 체포됐다.

형조로 압송된 윤유일은 볼기치기, 곤장, 주뢰형, 뼈를 부러뜨리는 형벌 등 갖은 악형을 당했으며 「장살」즉 「몽둥이로 때려 죽여라」는 판결을 받고 36세 나이로 1795년 5월 12일 밤 옥에서 매 맞아 순교했다. 윤유일의 시신은 강물에 버렸다.

윤유일의 동생 윤유오는 1790년 봄 윤유일이 제1차 북경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세계를 받고 신자가 됐다. 그는 형이 순교한 후에도 사람들을 모아 교리를 가르쳤고 신심을 북돋우었다.

1801년 순조가 천주교를 사교로 규정하고 신자들을 색출 고발케 하는 한편 배교하지 않는 신자들은 극형에 처하도록 하는 신유박해를 일으키자 윤유오도 고향 양근 관아의 포졸들에게 체포됐다.

윤유오는 『제 형이 가르쳐 준 십계명은 인간이면 누구나 마땅히 실천해야 할 도리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에 대한 책을 밤낮으로 외우고 익혔으며 추호도 배교할 마음이 없습니다』라며 용감히 신앙을 고백, 1801년 3월 15일 양근 관아에서 조금 떨어진 큰길 가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윤점혜와 윤운혜는 1797년 함께 주문모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윤점혜는 동정생활

윤점혜는 동정을 지키기 위해 남장을 하고 윤유일의 집에서 숨어 살았는가 하면 과부 행세를 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강완숙의 집에서 동정녀 생활을 했다.

윤점혜는 이후 주문모 신부에 의해 동정녀 공동체의 회장으로 임명됐고, 신유박해 때 체포돼 고향인 양근으로 압송되었으며 1801년 5월 24일 순교했다.

윤운혜는 우상 숭배라며 조상 제사를 모시지 않다가 시댁 식구와 마을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자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며 서울 벽동으로 이사하고 교리서와 성물을 보급하면서 생활했다.

언니 점혜가 체포되자 곧 자신들도 체포될 것임을 예감하고 남편 정광수를 피신시킨 후 급습한 포졸들에게 혼자 체포된 윤운혜는 1801년 4월 2일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같은 해 윤유일의 아버지 윤장도 신유박해 때 좌포청에서 최창현(요한)을 신문하던 중 그 이름이 드러나 곧 체포돼 2월 20일 형조로 압송돼 3월 16일 임자도로 유배됐다.

◆오기선 신부가 후손들 찾아내

이처럼 윤유일의 집안은 신유박해 때 거의 전멸해 한동안 후손이 전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고 오기선 신부에 의해 1987년 윤유오의 후손으로 경기도 이천에 윤필용씨와 서울에 윤상순ㆍ상호ㆍ상옥씨 3형제가 있음을 밝혀졌다.

윤필용씨에 의하면 『조부 이전부터 「천주교 때문에 집안이 망했다」하여 천주교를 믿지 못하도록 완강히 배척하였으나 조모님은 조부 몰래 이불 속에 숨어서 기도를 드리고 성호 긋는 것을 보았고, 종조는 「미리내 공소」에 다녔었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종손인 윤상순(안드레아)씨 집안은 신앙의 맥을 그대로 이어 왔다. 윤상순씨는 현재 이천 성지를 관리하고 있으며 상순씨의 어머니 고 최이용(막달레나) 여사는 서울 홍제동성당 건립에 큰 도움을 줘 명동성당 「새벽」지에 소개될 만큼 유명하다.

조부의 반대로 장성한 후에야 개신교 교회의 땅까지 희사했다는 장로 윤필용씨는 곧 개종할 의사를 비치고 『조상이 피 흘리며 지킨 신앙의 맥을 이을 것』임을 자랑스럽게 고백했다.

리길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