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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명가를 찾아서] 4 순교자 정은 바오로와 후손들

리길재 기자
입력일 2012-02-09 수정일 2012-02-09 발행일 1997-04-20 제 2049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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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도 알아본 순교자 집안
후손 중 사제 5·수녀 2명 배출 
후원회 조직…순교정신 보급
수원교구 이천 단내 성지의 주인공 순교자 정은(바오로).

정은 순교자는 신자들 사이엔 대중적으로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한국 교회 내에서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시성의 열기가 다시금 고조되면서 신앙심과 인물됨이 부각되고 있는 순교자 중 한 분이다.

◆병인박해 때 백지사형

정은 순교자는 병인박해가 한창이던 1866년 12월 8일 남한산성에서 「백지사형」을 받고 순교했다. 백지사형은 나무에 몸을 묶어놓고 얼굴에 물을 뿌린 뒤 한지를 바름으로써 숨이 막혀 죽게 하는 방법으로「도배사」 또는 「도모지」라고 부르기도 했다.

정은 순교자는 동래 정씨 시조 정회문의 25세 손으로 사직서령공파에 속한다. 정은의 조부 정현서는 자를 원석이라 하였는데 성호 이익의 종형 소은 이진의 사위였다.

정은은 현서의 3남 언겸의 셋째 아들로 위로는 형인 환과 헌이 있었고 누님 두 분이 있었다.

정은은 또 홍 마리아와 혼인, 슬하에 일동과 수동과 딸 하나를 두었다.

정은의 후손들과 사학자들은 순교자 정은의 어머니 허 데레사가 천주교 신앙을 가졌던 만큼 정은의 조부 때부터 내방에서는 천주교 신앙이 싹트지 않았나 짐작하고 있다.

이러한 추측으로 정은의 집안이 한국 천주교회 초창기 때부터 신앙을 받아들였음을 알 수 있다. 또 이러한 추정은 정은의 후손 정규량 신부가 지은 「정씨가사」중 정은의 입교 동기가 기록된 내용에서도 증명해 주고 있다.

정씨가사는 『정은의 증조부가 등창을 않던 중 천주교 신자 조사옥으로부터 치료를 받는 동안 그에게 감화돼 온 집안 식구가 다같이 문교하였다』고 적고 있다.

세례를 받은 정은 집안은 일가와 마을 사람들의 박대와 비난에도 불구하고 김대건 신부로부터 성사를 받고 신앙생활을 해 온 것을 큰 영광으로 생각해 왔다.

정은은 1893년 기해박해와 1846년 병오박해, 1860년 경신박해, 1866년 병인박해 등 4차례의 큰 박해를 겪으면서도 신앙을 지켜오다 1866년 12월 2일 체포됐다.

체포 당시 포졸들이 자신을 잡으러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도 피신하지 않은 정은은 포졸들에게 재산 모두를 빼앗기고 64세의 쇠약한 몸으로 단내에서 남한산성까지 70여 리의 험한 산길을 끌려갔다.

정은의 재종손 정 베드로는 정은이 체포됐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포졸들에게 자헌해 체포돼 정은과 함께 순교했다.

정은과 정 베드로의 시신은 남한산성 동문 밖 개울창에 버려졌고 아들 일동과 수동이 야음을 틈타 정은의 시신을 지금의 단내 성지에 안장했다. 그러나 정 베드로의 시신은 끝내 찾지 못했다.

정은과 정 베드로가 순교한 뒤 그 가족들에 대한 일가들의 박해와 박대가 더욱 심해졌다. 그 중 정 베드로의 부인 「서울댁」은 자기 남편이 죽게 된 것은 천주교 때문이라며 포졸들을 앞세워 피신한 정은의 가족들을 잡으러 다녔다.

◆가족들 30년 피난 생활

정은의 가족들은 포졸들과 서울댁을 피해 인근「검은 바위」「옥시울 양지골」「안 단내 범바위골」등으로 은신하다 1867년 고향인 단내를 떠나 충주 용매와 제천 방아다리 소태 돌담이, 충주 청용, 여주 수룡 등을 떠다니며 30여 년간 산 속에서 숨어 살아야만 했다. 그러나 30여 년의 피신생활 동안 정은의 가족과 후손들은 굳건하게 신앙을 지켜왔다.

그 예로 단내 정씨 집안에서는 정규하(아우구스티노), 정원진(루가), 정규량(레오), 정운택(안드레아·현 수원교구 관리국장), 정민수(헨리코·추기경 비서) 신부 등 5명의 사제와 서울 성 바오로병원 정 마리에메 수녀, 여주 파티마 양로원의 정 마리아 수녀 등 2명의 수도자를 배출했다.

이들 성직자 수도자 모두는 정은의 부친 언겸의 후손으로 언겸의 큰 아들 환의 후손 중 정규하, 정원진 신부가 배출됐고, 순교자 은의 후손 중 정규량, 정운택, 정민수 신부가 배출됐다.

특히 정규하 신부는 1884년 말레이 반도 서남쪽 페낭신학교로 유학 간 신학생 중의 한 분이다. 정씨가사를 집필한 정규량 신부는 한 평생 김대건 성인 현양사업에 투신, 솔뫼 성지 대지 매입 등에 정열을 다바쳤다.

현재 수원교구 관리국장인 정운택 신부 역시 정은 할아버지의 생애를 추적, 정씨가사를 토대로 「검은 바위」를 집필했으며, 순례객들이 순교자 정은의 묘소에서 신앙의 굳셈을 배워갈 수 있도록 단내 성지를 단장했다.

◆후원회「단내가족」8백여 명

부제 때 홀로 단내 성지에서 조상들의 피난처까지 순례를 하며 신앙의 뿌리찾기에 열정을 보여 온 정운택 신부는 정은 순교자 후원회인「단내가족」을 조직, 현재 8백여 명의 후원 회원들을 지도하고 있다.

정운택 신부는 『정은 할아버지가 포졸들에게 잡히신 다음 홍 마리아 할머니가 어린 아들인 일동과 수동을 데리고 뒷산으로 피신했다가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아이들을 재워놓고 잠시 동네에 내려갔다 올라와 보니 호랑이가 버티고 있었다. 깜짝 놀란 할머니는 기도를 한 후 용기를 내어 아이들에게 다가가니 호랑이가 떠나 버렸다. 할머니는 이 광경을 보고 호랑이가 다른 짐승들이 아이들을 해치지 못하도록 지켜주지 않았나 생각하고 짐승도 순교자의 집안을 지켜주는구나 하며 크게 하느님께 감사했다고 한다』고 집안 구전을 소개해 주었다.

정 신부는 『아직도 고향 단내에는 천주교를 믿으면 죽는다는 인식이 강해 초대 교회 때부터 이어진 교우촌이지만 전교가 어렵다』고 안타까워 하고 『순교자의 가문도 자랑스럽지만 30여 년 동안 거친 풍상을 겪으면서도 신앙을 버리지 않은 조상들의 굳센 믿음이 개인적으로 더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단내 정씨 집안은 매년 추석 전 한 차례 정은 순교자 묘소가 있는 단내 성지에 모여 미사를 봉헌하고, 순교의 혈맥으로 이어진 가족간의 신앙을 확인하고 있다.

리길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