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한국교회 소공동체 20년] (5) ‘소공동체 가능성과 한계’ 지상토론

이주연 기자
입력일 2012-02-08 수정일 2012-02-08 발행일 2012-02-12 제 2782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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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에 사랑·평등 문화 토착화하는 소중한 장”
“한국형 소공동체, 평신도 중심의 상향식 발전 부족”
공동체 발전에는 모두의 노력이 필요
사제·수도자·평신도 함께 ‘협력’하며
지도력 성장·상하 경직된 문화 변화
의무 부과식 소공동체는 문제 … 자발성 중요
기존 신심단체 도태되지 않게 노력하는 등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 구현 위해 고민해야
“삼천년기 한국교회의 비전”, “교회를 비추는 거울”이라는 설명과 함께 제2차 바티칸공의회 교회론의 반영이라는 의견이 있는가 하면 “위에서부터의 무리한 접목으로 오히려 한국교회의 미래를 어둡게 한다”는 비판도 제기되는 소공동체.

도입 20년을 맞고 있는 현 시점까지도 한국교회에서 소공동체는 아직도 그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린다.

신년기획으로 ‘한국교회 소공동체 20주년’을 연재하고 있는 본지는 이러한 교회 안의 찬성적?비판적 견해를 함께 들어보는 기회를 마련했다.

구체적인 사목 현장에서 경험한 소공동체의 결실은 무엇이고 당위성은 무엇인지, 또 직면하고 있는 가능성과 한계는 어떠한 것인지 정월기 신부(서울대교구 창5동본당 주임·주교회의 소공동체소위원회 위원)와 차동엽 신부(미래사목연구소장)가 각각 그 의견을 밝혔다.

① 소공동체와 함께 발전하는 평신도 지도력·한국사회 - 정월기 신부(서울 창5동본당 주임·주교회의 소공동체소위원회 위원)

정월기 신부
소공동체 모임에서 강의할 기회가 있어서 질문으로 시작했다.

“소공동체 하면 생각나는 것이 무엇인가?”

누군가 대답을 했다.

“안 된다”, “어렵다.”

본당에서 소공동체 사목을 추진하다 보면 ‘잘 안 된다’나 ‘어렵다’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소공동체 모임에 사람들이 잘 모이지 않고, 구역장·반장 등의 봉사자로 지원하려 하지 않고, 모임 장소를 제공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공동체의 장점이나 결실은 무엇인가?

마음을 터놓고 말할 수 있어서 좋다. 이웃 사촌의 소중함을 발견한다. 모임이 기다려지기도 한다. 성경을 가까이 하게 되었다. 성경에 비추어 삶을 바라보고 삶을 나누는 것이 자연스러워졌다. 평신도들이 소공동체를 꾸려가면서 평신도 사도직과 지도력이 성숙되고 있다. 마음과 생각과 지혜를 나누면서 배우는 것이 많다. 서로에게 이웃이 되어 주고 우정을 맺고 어려울 때에 도움을 준다. 형제자매처럼 만나니 눈치 볼 것 없이 편안하다. 작은 사람이나 약한 사람도 구역장·반장을 하면서 가난한 사람들도 주체의식을 갖고 교회에 봉사한다. 소공동체는 지역의 문제나 어려움에 참여하면서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는 장이 된다. 가난한 사람을 돕거나 연대하고 지역 환경보호나 정의로운 활동에 참여한다.

가정 공동체든 소공동체든 공동체를 건설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단체처럼 어떤 규칙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어떤 사명만 해내면 되는 것도 아니다.

소공동체는 교회처럼 다양한 모임과 활동이 이루어진다.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색깔을 내고 자신의 기호에 따라서 참여한다. 2~4명이 살아가는 가정 공동체도 얼마나 어려움이 많은가! 그러나 어려움이 있다고 하더라도 가정 공동체를 포기하지는 않는다. 보다 나은 가정 공동체를 위해서 어떤 노력이든지 시도하게 된다.

사회학적으로 인간은 공동체를 필요로 한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말했다. 공동체 안에서 사람들은 가족처럼 얼굴을 맞대고 관계를 맺고 친밀하게 인격적 관계를 맺으며 인격성장과 공동선을 이룬다. 인간은 친밀감이 없이는 자기 존재를 실현할 수 없다. 인간은 고유한 인격체로서 있는 그대로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어하며 이런 친교 활동을 통해서 자신을 실현하고 공동체에 기여를 하며 의미와 보람을 체험한다. 소공동체는 가정처럼 이런 친교를 이루는 장이다.

교회는 친교의 공동체이다. 교회는 제도적인 모습에서 만족하지 못하고, 친교를 드러내는 공동체를 향한 노력을 초대교회에서부터 꾸준히 기울여왔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공동체를 이루면서 교회를 준비하셨다. 12사도 공동체에서 출발하여 초대교회 공동체(사도 2, 44~47 4, 32~35 참조)를 향한 노력이 이어졌다.

교회는 수도 공동체를 통해서 제도적이고 위계적인 모습에 머물지 않고 친교적이고 수평적인 모습의 교회를 이루어왔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사랑하고 친교를 맺는 교회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핵심 교회론은 ‘친교’라는 것을 1985년 특별 주교 대의원회의에서 확인시켜 주었다.

소공동체는 친교의 공동체가 되는 데 좋은 대안으로 인식되어 여러 대륙에서 활발하게 전파되고 있다. 특히 소공동체는 평신도들의 사도직 활동과 신앙과 삶에 필수적인 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제는 본당 사목도 구역과 반소공동체 없이는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이 소공동체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교회 교도권에서 지속적으로 권장하고 있다.

교회 교도권과 소공동체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친교 교회론을 토착화하고자하는 노력은 먼저 라틴아메리카 기초 교회 공동체에서 찾을 수 있다. 50~60년대에 기초 교회 공동체를 경험한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는 1968년 콜롬비아 메델린에서 총회를 열고 메델린 문헌을 선포하였다. 이 문헌에서 기초 교회 공동체가 정식으로 교회 교도권 문헌에 등장하게 된다.

메델린 문헌 15장 ‘연대사목’ 제10항을 보면 그리스도교 바닥 공동체가 나온다. 여기서 주교들은 바닥 공동체를 “친교를 체험하고 발견하는 곳이며 본당 중심의 교회에서 한걸음 나아가 삶의 현장에 있는 교회 기초 조직”으로 이해하고 있다.

1975년 교황 바오로 6세는 ‘현대의 복음 선교’ 58항에서 “기초 교회 공동체는 교회적이고 인간적인 유대를 더 강화하고자 하는 데에서 발생한 새로운 교회 형태”라고 지적하면서 소공동체가 교도권과 일치하기를 권고하고 있다.

1976년 케냐 나이로비에서 열렸던 동아프리카 주교위원회는 기초 교회 공동체를 교회가 가장 “지역적으로 육화”한 형태로 보고 기초 교회 공동체를 사목의 우선에 두고 있다.

1979년 멕시코 푸에블라에서 열렸던 제3차 라틴아메리카 주교 총회에서 주교들은 기초 교회 공동체가 교회 구조의 중추가 되어 공동체로 엮어진 본당 공동체가 되길 희망했다. 여기에서 기초 교회 공동체의 교회론은, 교회를 역사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형성된 하느님의 가족, 하나의 백성으로 강조한다(239, 240, 261항). 이 문헌은 기초 교회 공동체를 가장 심도있게 다루고 있으며, 기초 교회 공동체는 “중대한 교회적 실재이며 특히 우리들의 것이며 교회의 희망이다(629항)”고 선언한다.

아시아 주교들은 1990년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개최된 제5차 총회에서 소공동체의 중요성을 역설하면서 “공동체들의 친교(communion of communities)”를 아시아 안에서의 “교회의 새로운 존재 양식(a new way of being Church in Asia)”으로 선언하였다. 아시아 주교들과 연대하여, 90년대 초에 한국교회도 서울교구를 시작으로 소공동체 사목에 적극 참여하게 된다.

1990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회칙인 ‘교회의 선교 사명’에서 소공동체를 “그리스도교 교육과 선교 추진의 좋은 중심터”로 인정하면서 소공동체를 교회 활력의 표지이며 신자 양성과 복음화의 도구이며 ‘사랑의 문화’에 바탕을 둔 새로운 사회의 출발점으로 이해하고 모든 지체의 능동적인 참여로 복음적인 공동체를 건설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2010년 세계 주교 대의원회의 후속 문헌인 주님의 말씀에서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73항에서 성서 사목 활동이 작은 공동체들의 성장을 촉진하는 것을 환영하고 있다. 이 공동체들을 다른 교회 운동들과 연결 지으면서 양성과 기도와 성서 지식을 증진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기를 희망했다.

2011년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아프리카주교대의원회의 후속 권고인 “아프리카의 헌신(Africa’s Commitment)” 121항에서 “소공동체는 … 평신도들의 세례 열정을 촉발시키는 기초 조직”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또한 133항에서 “그리스도 제자의 공동체로서 교회는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주고 나누는 공동체이며, 이것을 본당과 가정과 소공동체에서 드러내야 한다”고 역설한다.

교회 교도권은 한결같이 소공동체가 교회 사목 구조 안에서 중요한 장임을 인정하고, 지역 주교와 일치하고 다른 단체들과 함께 발전할 것을 희망하고 있다.

한국의 소공동체와 그 운영

한국교회는 90년대부터 소공동체를 추진하고 있다. 구역과 반소공동체가 지난 20년간 본당 사목과 복음화에 큰 역할을 담당해 왔다.

소공동체가 사목과 복음화에 필요한 장이라면 활성화를 해야 한다. 소공동체를 활성화하려면 절실히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소공동체는 누구 한 사람이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팀을 구성해서 팀을 활성화하고 그 팀이 공동체의 필요에 적절히 응답하도록 하며, 이 팀이 자발성과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어느 정도 자치권을 부여할 필요가 있다.

현재 몇몇 본당에서 구역 단위 자치회를 두고 자치회가 스스로 운영되도록 권한을 위임하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소공동체 운영팀은 본당팀과 구역팀으로 정할 수 있다. 본당팀은 주임신부와 소공동체 담당 수녀와 사목회장과 총구역장단이 되겠다.

팀을 구성했으면 그 팀을 운영하는 협력 사목이 소공동체 영성을 드러내야 하겠다. 사목의 현장에서 ‘협력’한다는 것은 사목의 모든 사항을 공통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충분한 시간을 갖고, 의사소통을 하고, 함께하는 것이다. 협력은 선교사명을 위하여 모든 은사들을 드러내고 통합하는 것이다. 협력은 각자 안에 있는 은사를 잘 조화하고 통합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을 수행하는 데에 있다.

소공동체와 협력 지도력

소공동체 사목을 하려면 변화시켜야 할 것이 많다.

먼저 본당 사목 구조도 소공동체 사목을 지원하는 형태로 바꾸어가야 하고 지도력도 소공동체 팀 지도력이라야 한다. 본당의 구역·반 소공동체가 활성화되는 데 가장 절실한 것은 사제와 수도자와 평신도 봉사자들의 지도력이다. 이들이 팀으로 활동하게 되면 그 과정에서 공동체를 체험하게 된다. 소공동체가 자발성과 생명력이 자라나 활성화 되도록 하기 위해서 본당신부의 영성과 의지와 태도는 대단히 중요하다. 본당신부의 영성과 지도력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고 소공동체를 추진하면서 배우고 익히게 되는 것이다. 백성과 우정을 맺고 사랑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한 걸음 한 걸음 배우면서 각 공동체에 적절한 지도력을 익혀가게 된다. 그런 과정에서 팀 지도력이 발전하고 공동체가 발전하게 된다.

본당신부가 명령하고 지시하기보다는 섬기고 함께하는 모습을 드러내면 그런 지도력이 그대로 수도자나 신자들에게 전달된다. 논의하고 결정하고 실천해가는 과정에서 서로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함께하는 모습을 드러내면(교회헌장 30항 참조) 일선의 구역?반 소공동체 봉사자들도 그런 지도력을 드러낸다.

본당신부가 지배하는 지도력이 아니라 섬기고 함께하는 지도력을 드러내면 신자들은 그 안에서 예수님의 지도력을 만나게 된다.

예수님은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요한15:15)”고 하시면서 제자들과 우정을 맺으며 ‘벗 지도력’을 드러냈다. 하느님 안에서 지배적인 상하 관계가 아니고 수평관계의 우정의 지도력을 드러내는 것이다.

본당 주임신부는 일차로는 소공동체 담당 수도자와 함께하고 다음으로는 본당 소공동체 담당 지도자들과 함께하면서 지도력을 익혀간다. 팀 지도력을 통해서 한국교회의 지배적인 사목 형태를 변화시켜갈 수 있다. 소공동체는 지배적인 지도력에서 함께하는 지도력으로의 변화뿐만 아니라 한국사회에 뿌리 깊이 스며있는 위계적인 상하 인간관계를 역전시켜 평등하고 친교가 살아있는 사랑의 문화를 완성하고자 하는 것이다.

본당신부와 수도자와의 협력

소공동체를 운영하는 반장과 구역장이 지배하는 모습이 아니라 섬기고 협력하는 모습을 드러내야 하는데 모델을 어디서 찾을까? 아무래도 본당에서 소공동체를 촉진하는 주임신부가 함께하는 사람들과 어떤 지도력을 드러내는가를 보고 배울 것이다. 주임신부와 소공동체 담당 수녀가 함께 드러내는 지도력은 모델이 되기도 한다.

한국교회의 소공동체는 대부분 여성 구역장 반장들이 중심역할을 하게 되고, 이 여성 봉사자들은 자신들의 지도력 형태를 수도자에게서 배우게 된다. 수도자가 명령하거나 지배적이지 않고 섬기고 함께하면 평신도들도 그런 지도력을 드러낼 것이다.

나와 함께하는 수도자는 소공동체를 추진하면서 행복할까?

가부장적인 가정에서 자라 상하 위계질서가 주류를 이루는 한국문화에서 성장하고 가톨릭의 위계적인 제도 안에서 성직계에 속한 나로서는 사목 현장의 수도자와 수평관계를 맺으며 함께한다는 것이 쉽지가 않다. 함께하는 상대방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 나는 함께한다고 하지만 수도자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소화할까? 본당 사목을 하면서 같은 공간에서 같은 일을 하면서 수도자들은 주임신부로부터 존중 받기를 원하고 일방적인 관계보다는 상호 협력관계를 맺으며 사목의 동반자가 되길 원한다. 본당신부로서 나는 수도자와 함께한다고 하는데 수도자는 나와 함께하는 것에 만족해하고 행복해하는가? 그것이 문제이다. 나는 수평관계로 다가간다고 하지만 상대방은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일방적인 함께함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소공동체 담당 수도자에게 물었다. 나는 함께한다고 하는데 수녀님도 그렇게 받아들이고 함께하는 보람이 있는지? 소공동체나 본당 사목의 중요한 사안을 함께 의논하고 결정하고 추진한다고 하는데 수녀님도 그렇다고 인정하는지? 한마디로 말하면 소공동체 사목을 함께하면서 행복한지?

나의 이런 질문에 수녀님은 긍정적인 대답을 했다. 지난날 여러 본당에서 본당 주임신부와의 수평관계와 수직관계 경험을 이야기하며, 나와는 인격적인 관계 안에서 서로 존중하고 격려하며 편안하게 소통하면서 행복한 사도직을 하고 있다고 답해주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나도 행복해짐을 느꼈고, 소공동체는 억지로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행복해지는 것을 통해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선물임을 발견했다.

협력사목은 각자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선물(탈렌트)을 피워내며 공유된 사목 비전과 방향을 향해서 서로 함께가는 여정이다. 수도자가 소공동체에 참여하면서 자신이 받은 선물을 잘 드러내고 활용하면서 주임신부와 편안하게 협력하고 있다면 소공동체 지도력의 중요한 초석이 놓인 것이다. 상하 위계적인 한국사회에서 주임신부와 수도자가 수평관계로 발전해가면서 협력하고, 이런 수평관계가 점점 소공동체 안에서 자리잡아 하느님 안에 누구나 평등한 세상을 형성하는데 소공동체는 소중한 장이 되어주고 있다.

한국사람은 둘만 모이면 나이를 따진다. 상하 인간관계가 깊이 침투되어 있다. 이런 상하 지배적인 인간관계를 평등하고 우정을 맺는 복음적인 인간관계로 바꾸고자하는 것이 소공동체이다.

상하 지배관계에서는 사람들은 다른 지배자들이 설명하는 대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받아들이도록 길들여진다. 한편, 함께하고 우정을 맺는 관계는 상생(相生)과 홍익인간(弘益人間)과 평등의 방법으로 작용한다. 소공동체는 상하 위계적이고 지배적인 문화를 복음의 사랑과 평등 사상으로 역전시켜서 예수 그리스도의 식탁 공동체로 대표되는 사랑의 문화를 한국문화에 토착화시키고 있다. 소공동체는 “사랑의 문화에 뿌리를 둔 새로운 사회의 출발점이다(교회선교사명 51항).”

② 소공동체 역기능과 한계, 발전 제언 - 차동엽 신부(미래사목연구소장)

차동엽 신부
본디 필자는 소공동체를 미래교회의 비전으로 보는 입장이다. 한데 가톨릭신문사로부터 소공동체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개진해달라는 요청이 왔다. 고사했지만 관철시키지 못했다. 한국천주교회에 대한 뿌리칠 수 없는 애정 때문이었다.

기왕에 맡은 역할, 혹독한 정신으로 임할 요량이다.

우선 소공동체에 대한 부정적 관점에 귀를 기울여 볼 것이다. 신학적 비판이든 실천적 비판이든, 겸허히 경청하면서 수용해야 할 제언들을 수렴하는 것이 기초가 될 것이다.

다음으로 한국 소공동체의 역사를 필자의 관점에서 간략히 일별하는 가운데, 가능성과 한계를 확인해 볼 것이다. 이 과정에서 소공동체의 필요성에 대한 원론적인 담론은 피할 것이다. 결론을 대신하여, 앞의 두 단계 성찰을 토대로 발전적 제언을 꾀할 것이다.

소공동체 역기능

필자는 소공동체에 대한 회의적 내지 부정적 견해를 다양한 일선 사목자들로부터 직접·간접적으로 접해왔다. 그 가운데 가장 강도 높은 것을 꼽으라면, 그것은 단연 이제민 신부가 2007년 10월 21일 자신의 홈페이지 자료실과 10월 29일 ‘지금여기’ 독자투고란에 올린 글이다. 그는 첫머리부터 이렇게 한방에 단언한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나는 한국교회의 미래가 소공동체에 달려있다고 보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한국형 소공동체는 한국교회의 미래를 어둡게 한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한국형 소공동체는 그 주도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자율적이지 않고, 공의회의 정신을 외치는데도 불구하고 공의회 이전의 성직자 중심 교회로 돌아가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된 원인은 간단하다. 바로 “한국형 소공동체에서는 소공동체 운동을 무리하게 반·구역에 접목시키다보니 소공동체가 본래 지향한 정신이 빛을 잃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부연한다. “한국형 소공동체를 주도하는 자들은 본당이 소공동체 중심 체제로 변환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소공동체를 종전의 반모임과 차별화하지만, 그들의 주장대로 소공동체 중심으로 운영되는 본당은 거의 없다. 그들이 성공 사례로 내세우는 본당의 소공동체 모임도 종전의 반모임과 거의 다르지 않고, 소공동체장의 역할도 종전 반장의 역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 신부는 한국천주교회 소공동체 운동이 역기능을 하고 있는 것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소치라고 지적한다. 이 신부는 사목현장의 현실을 비판의 근거로 제시한다.

“내가 사목하는 반송본당의 경우 모든 활동을 소공동체 중심으로 하다 보니 여성 연합회의 기능이 거의 마비되어 있다. 성서반은 운영할 수 없다. 소공동체가 이들 작은 공동체들이 할 일까지 다 맡아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신자들은 원하든 원치 않든 본당이 의무적으로 요구하는 한국형 소공동체에 몸을 싣게 된다.”

글 말미에서 이 신부는 사제 연수회 그룹토의에서 나온 의견들을 액면 그대로 밝혔다. 대표적으로 다음과 같은 부정적 측면들이 있다.

▲한국형 소공동체는 초기 교회와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에 근거한 공동체라 보기 어렵다. ▲명칭 때문에 신자들이 혼란스럽다. ▲한국형 소공동체는 본당신부에게 피곤하다. ▲교우들도 힘들어 한다. ▲자발적이지 않다. ▲20평 아파트에 사는 신자와 60평 아파트에 사는 신자들의 공감대를 만들기가 쉽지 않다. ▲관심사와 생활 양상이 다른 이들이 매주 또는 매월 정기적으로 한 자리에 모여 복음 나누기 등 생활 나누기를 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복음 나누기도 7 단계 말고 다른 방식이 요구된다. ▲사제의 관심사에 따라 소공동체 모임이 잘 되기도 하고 잘 안되기도 한다. ▲다른 신심단체도 나름대로의 조직이다. 본당은 그들의 발전을 도와야 한다.

이렇듯 이제민 신부 주장의 요지는 한국형 소공동체의 전면적 재고 내지 폐지다.

한국 소공동체 역사 일별

흔히 한국 소공동체의 본격적인 출범을 1992년으로 여긴다. 필자는 한국 소공동체의 미래를 위해 이 관점을 폐기해야 한다고 보는 입장이다. 왜냐하면 한국의 소공동체는 어느 한 시기에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한국적 사목현실이 오랜 시간에 걸쳐 잉태하고 탄생시킨 역사적 산물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1990년대 중반 박사학위 논문 전반부에 한국 소공동체 역사를 기술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이에 대해 집중적으로 연구할 기회가 있었다. 수집한 1차 자료들과 다양한 경로를 통해 관계자들에게서 얻어낸 정보를 종합한 결과, 한국 소공동체 역사가 크게 3단계로 발전해 왔음을 파악할 수 있었다.

제1기는 1960년대 말부터 1984년까지로, 본당내 ‘구역’ 설정기다. 60년대 말부터 주로 도시에서, 부분적으로는 시골에서 교통 사정이 점차 개선되면서 기존의 공소가 폐쇄되고 본당으로 흡수되어 본당 관할 구역이 확대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와 더불어 본당 신자수가 증가하면서 이제 본당은 종래 수용 능력을 초과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바로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구역’을 설정하여 본당 관할구역을 분할 관리하는 본당이 생기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생긴 구역 조직은 40~60세대를 한 구역단위로 하여 편성되었다. 처음에는 구역만 조직하였으나 70년대에 들어서면서 상황의 변화에 따라 ‘반’으로 세분하는 본당도 생겼다.

이후 1970년대 말부터 한국교회는 남미 기초 공동체와 개신교 구역반 조직 활동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평신도 사도직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활성화 방안을 추구하게 되었다. 그 결과 일부 앞선 본당신부들의 주도 하에 적극적인 구역반 모임이 추진되었고, 1기의 말기인 80년대 초에는 구역반 모임의 중요성을 인식한 서울교구(1980), 부산교구(1981), 대구교구(1982) 등이 매달 각 본당에 구역반 모임지를 교구 차원에서 발간?지원하기 시작하였다. 이 때부터 구역 조직이 공동체 운동의 성격을 띠기 시작했던 것이다.

제2기는 1984년부터 1990년대 전후까지로 보는데, 이 시기는 다양한 쇄신 운동이 전개되는 등 전환기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한국천주교회는 1984년 창립 200주년을 기해 한국교회의 현실 진단과 미래의 사목 방향을 가늠하기 위해 ‘사목회의’를 개최 추진하였다. 그 결과로 첫째, 평신도 사도직 강화, 둘째, 지역 공동체 활성화, 셋째, 토착화 등의 과제가 한국교회가 해결할 당면 사안으로 뚜렷이 부각되었다. 이 시기를 즈음하여 15개 교구 중 9개 교구가 구역반 모임을 교구 사안으로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드러난다.

제3기는 1992년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는 시기로서, 소공동체 사목의 적극적 추진 단계다. 한국에서 소공동체를 본격적인 사목비전으로 삼는데 기폭제가 된 것은 반둥에서 ‘공동체들의 친교’를 ‘아시아교회의 새로운 존재 양식’으로 규정한 1990년 제5차 아시아주교회의(FABC)였다. 이후 서울대교구는 1992년 주교 사목교서에서 ‘2000년대 복음화 계획’의 일환으로 소공동체 운동을 제시하였다. 김수환 추기경은 1993년 주교 사목 교서에서 1992년 발표된 내용을 거듭 촉구하면서, 소공동체 운동 추진에 모두가 적극 동참해 줄 것을 당부하였다.

또 소공동체 운동의 필요성은 교구적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평신도들에 의해서도 제기되었다. 한 예로 1992년 3월 21일 본당 사목 회장단 모임에서 복음화의 문제점과 그 원인 분석을 하였는데 그때 소공동체 운동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그 이후 소공동체가 전국 교구 사안으로 확산된 과정은 적어도 소공동체 관심자들에게는 새로울 것이 없으니, 해마다 있는 소공동체 전국모임, ASIPA 모임, 주교회의 산하 소공동체위원회 활동 등을 통하여 소공동체 대세론이 전개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음을 언급해 두면서, 상세한 기술은 생략하기로 한다.

한계와 가능성

필자는 일부러 소공동체의 역사를 더듬어 보았다.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비판의 소리에 귀 기울여 소공동체의 한계와 가능성을 가늠해 보기 위함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필자는 이제민 신부가 여러 신부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제시한 비판 가운데 다음의 세 가지를 진지하게 수용해야 한다고 본다.

첫째, 성직자 중심의 하향식 소공동체가 아닌 평신도 중심의 상향식 소공동체 운동이 되어야 한다. 소공동체가 199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추진되는 과정에서 사제들 및 신자들과 아무런 공유 비전의 형성도 없이 주교들의 주도하에 교구 사안으로 책정되고 공문에 의해 하향식으로 추진된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이런 기획 및 실행 방식은 그대로 본당 사목자에게 전이되어 똑같은 현상이 본당 소공동체 결성 과정에서 빈번히 발생하였다. 결정은 사목자들이 하고, ‘자율적 참여’는 신자들에게 의무적으로 부과하는 모순을 범했던 것이다. 이는 소공동체 사목에서 치명적인 과실이다. 반드시 시인하고 개선할 일이다.

둘째, 기존의 신심단체들을 소공동체로 인정해야 한다. 소공동체를 너무 강조하다보니 본당의 운영이 소공동체 일변도로 경직되고 획일화된 것이 사실이다. 그 결과 레지오 마리애를 대표로하여 도태당한 신심단체들이 속출하였다. 그리고 소공동체를 부각시키려고 소공동체와 단체를 굳이 구분하려는 무리한 개념정의 시도들도 다반사로 있었다. 필자의 견해로 신심단체들을 굳이 소공동체와 차별화하려는 신학적 접근은 ‘오버’한 것으로 보인다. 약간의 차이는 있으되 그렇게 본질적인 다름은 아니기 때문이다. 같은 성령에 원천을 둔 다양한 은사 발휘의 장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점도 보다 넓은 지평에서 재고해야 할 것이다.

셋째,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을 온전히 구현하는 소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바르게 말해서 우리 한국천주교회는 공의회 정신을 충분히 연구하지도 이해하지도 실행하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더 공부하고 교육해야 하며, 그에 머물지 말고 언젠가 있을 3차 공의회 현안, 예를 들면 포스트모던 세대의 신앙생활 양식 등에 대해 미리 고민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제민 신부의 모든 비판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그가 대변한 사제들의 견해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제들의 숫자도 결코 적지 않다. 매년 개최되는 전국소공동체 모임에 자발적으로 참석하는 사제들과 평신도들만 해도 그렇다. 또한 월간 「사목정보」지를 통해서 매월 집중 취재·보도된 사례들(「사목정보」1,2,3,4,7,20,42호 참조)만 보아도 소공동체를 온통 문제 덩어리로만 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객관적으로 보더라도 잘 되는 소공동체가 얼마든지 있다.

이런 이유로 필자는 지난 소공동체 역사에서 대표적으로 다음의 세 가지 가능성을 본다.

첫째, 기존의 구역반은 소공동체를 위한 ‘한국적’ 가능성이다.

이미 준비되어 있으니. 이미 있는 것을 활용하는 것은 지혜다. 새로 만든다는 것은 너무 소모적이다. 이미 있는 단체를 소공동체로 인정하는 관점이 필요하듯이 이미 있었던 구역반조직을 소공동체 퀄리티로 끌어올리는 것도 지혜인 것이다.

둘째, 소공동체에 대한 사목자의 사목적 관심도 한국적 가능성이다.

사목자의 사목적 행위를 무조건 신자들의 자율권 침해로 보는 시각도 지양되어야 한다. 물론, 권위주의적이고 독단적인 사목 직무 수행은 반드시 극복해야 한다. 하지만 사제의 사목적 행위를 모두 성직자중심주의로 싸잡아 말하는 것도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사제가 보조성의 원리에 입각하여 신자들을 돌보는 한에서, 사제의 사목적 개입은 권장사항이지 금기사항이 아닌 것이다. 그러니, 사목자가 소공동체에 열정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사목적 자산이며 가능성 아니겠는가.

셋째, 평신도들의 자발적 사명감도 한국적 가능성이다.

천주교를 한국에 도입시킨 주역들인 평신도들은 초기 교회 창립 과정에서부터 주체적 사명감을 잃지 않았다. 얼핏 유럽교회와 미국교회가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통하여 평신도 주체성을 많이 고양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들은 2000년 교회사에서 사목의 대상으로 길들여진 타성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한국 천주교 신자들은 애초부터 주인의식을 갖고 교회생활을 해 왔다. 핏속을 흐르는 주인의식은 빼앗으려고 해도 빼앗기지 않는다.

제언

일반적인 소공동체 담론을 피하였다. 그것은 이 글의 전제다. 이제 비판적 관점과 가능성의 관점을 종합하며, 결론을 대신하여 총론적 제언을 해본다.

1) 세 가지 우선적 선택

앞의 고찰을 전제로 하여 한국 소공동체의 발전적 미래를 위한 제언으로 필자는 다음의 세 가지 우선적 선택을 권하고 싶다.

첫째, 보조성의 원리를 살리는 소공동체 운용이 되어야 한다.

기존의 소공동체 운용이 성직자 중심주의니 위로부터의 운동이니 의무적 색채가 농후하니 하는 비판을 받고 있는 이유는 한마디로 ‘보조성의 원리’가 전혀 작동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와 교회법에 명시된 교회 운용 원리는 교계 원리, 협의체 원리, 그리고 보조성의 원리다. 소공동체에 대한 비판의 요지는 소공동체가 ‘교계 원리’ 일색으로 운영될 뿐 ‘협의체 원리’는 전혀 구현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 소공동체 운동이 잘 된다고 하는 본당들을 보면 이 보조성의 원리가 이상적으로 발휘되고 있음을 본다.

둘째, 다양성을 살리는 소공동체 추진이 되어야 한다.

거듭 언급하지만 한때 ‘단체’와 ‘소공동체’의 차이를 굳이 강조해서 구별했던 적이 있다. 필자는 이것이 소공동체의 확산에 도움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반발과 저항을 불러일으켰다고 본다. 그리고 신학적으로 신심단체가 소공동체가 되지 못하는 이유를 억지로 갖다 붙이는 것은 경직된 접근법이라고 본다. 한 걸음 양보해서 만일 어떤 특정 단체가 ‘소공동체’의 필요 요건을 결여하고 있다면 필요한 것만 보충하면 되는 것이다.

요지는 이미 있는 교회 자산을 백분 활용하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다양성의 시대를 넘어 융합의 시대에 살고 있다. 기존의 구역반, 기존의 신심단체, 액션단체 등의 역사적 기원을 존중하면서 그들을 소공동체 사목의 터로 활용할 줄 아는 융통성과 포용성이 필요하다.

나아가 사목의 사각지대와 소외층까지 커버하는 다양한 소공동체를 발생시키는 것도 생략할 수 없는 과제다. 본당 내에서도 가능하다.

셋째, 신자 은사 계발 및 발휘를 촉진하는 소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복음나누기 7단계나 통합성이 결여된 프로그램만 반복적으로 돌리는 것은 신자들을 우민화하거나 은사 발휘를 저해할 소지가 높다. 참여자들이 참여해서 얻는 인센티브가 보장되지 않으면 금세 싫증을 내거나 불참으로 자신의 불만을 표현한다. 그러므로 단계적 성장 프로그램을 마련하여 은사계발 및 발휘를 촉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인천교구의 경우 9단계 단계적 성장 교육을 도입하고, 매월 구반장 교육에 각 지구의 사제들이 강사로 봉사한 결과, 양적·질적 성과를 올리고 있다.

2) 주님이 세우신다

교회의 역사에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경륜이 작동하고 있다. 역사를 통하여 성령의 감도가 흐르고 있다. 교회와 교회 비전은 사람이 ‘임의로’ 건설할 수도 폐기할 수도 없는 것이다. 본회퍼(D. Bonhoffer)는 ‘베드로’ 곧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마태오 복음 16장 13~18절의 말씀을 이렇게 묵상했다.

“어떤 사람도 교회를 세울 수 없습니다. 오로지 그리스도 혼자서 세웁니다. 누구든지 교회를 세우고자 한다면, 확신컨데 그는 이미 파괴를 시작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도 원하지 않고 자신도 알지 못한 가운데 우상의 신전을 세우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고백해야 합니다. 그분이 세우는 것이라고. / 우리는 선포해야 합니다. 그분이 세우신다고. / 사람의 눈에는 허물어지는 시대로 보이겠지만 / 그분의 눈에는 건설의 위대한 시대인 경우가 때때로 있을 수 있습니다. / 사람의 눈에는 위대한 교회의 시대로 보여도 / 그분의 눈에는 파괴의 시대로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가 그의 교회에 선사하는 커다란 위로입니다.”

이는 소공동체 예찬론자에게도 비판자에게도 똑같은 경종이다.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통하여 교회를 세우도록 해야한다는 말이다.

그리스도는 오늘도 당신의 교회를 손수 세우고 계신다. 박해와 실패, 침체와 쇠퇴 속에서도 여전히 당신 방식으로 교회를 세우고 계신다.

이주연 기자 (miki@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