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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인터뷰] 장편소설 「흑산」 펴낸 소설가 김훈

주정아 기자,사진 서상덕 기자
입력일 2011-12-07 수정일 2011-12-07 발행일 2011-12-11 제 2774호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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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독한 박해로 배교했더라도 하느님은 용서하셨을 것”
고문 겪어야만 했던 신앙 선조의 고통 객관적 서술
매질 견뎌야 한다는 것 인간에 대한 몰이해서 비롯
배교이거나 순교이거나 모든 인간 삶 경건·소중해
소설가 김훈은 「흑산」에서 순교를 예찬하지도 배교를 변명하지도 않는 대신, 고문 당하는 이에게 혹독한 매를 끝까지 견디라고만 강요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일종의 야만적인 행위라고 덧붙였다.
소설가의 소장품이라 보기엔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물건. 손때 묻은 양팔저울이다. 추와 수평을 이룬 저울접시에는 몽당연필이 수북이 쌓여 있다. 한의사였던 외할아버지가 극약 무게를 철저하게 재기 위해 사용하던 물건이라고 한다. 매일 이 저울을 바라보면서 소설가는 현실의 무게를 냉정하게 응시한다. 늘 형평을 지키려는 강한 의지가 묻어났다.

김훈(아우구스티노·63)씨의 집필실에 들어서면 특별히 눈 둘 곳이 없다. 책상만도 대여섯 개에 이르지만, 책은 많지 않다. 그나마 소장한 책 대부분은 바로 ‘사전’이다. 그에게 필요한 책은 자료나 사전이라고. 일종의 일을 하기 위한 도구라는 설명이다. 소설가이지만 소설도 거의 읽지 않는단다. 소설가 겸 자전거레이서답게 자전거와 몇 개의 바퀴가 그를 소개한다. 김씨는 인터뷰 질문에도 군더더기 없이, 마치 정리해둔 원고를 읽듯 명쾌하게 응답했다. 출간 즉시 세간의 관심몰이를 이끈 그의 새로운 소설 「흑산(黑山)」을 가운데 놓고 인터뷰가 이어졌다.

김훈의 집필실에 걸린 양팔저울. 김씨는 매일 이 저울을 바라보면서 현실의 무게를 냉정하게 응시한다.

김훈씨는 “저는 지금은 신앙인이 아닙니다”라는 말로 인터뷰 첫 마디를 열었다. 가톨릭신문의 인터뷰인 것을 꽤나 의식한 말투였다. 이어 첫 질문이 떨어지자마자 소설에 대한 총체적인 소개를 일사천리로 풀어나갔다.

“흑산은 신앙인의 관점에서 쓴 것은 아닙니다. 물론 순교와 배교의 문제를 다루지만, 관찰자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써내려간 글입니다.”

소설 속에는 순교자와 배교자가 있다. 순교와 배교를 거듭하는 사람이 있다. 배교의 덕으로 살아남은 자도 있다. 매를 못 견뎌 배교했지만, 이미 심하게 매를 맞아 죽어버린 사람도 있다. 천주교 신자들은 형틀에 묶여 죽기 직전까지 맞으며 배교를 강요당한다. 이 때문에 배교한다. 그러나 그것이 배교인가? 김씨의 의문은 여기부터 시작됐다.

“매에 못 이겨 배교한 자들이 단순히 지옥에 갔다고만 생각할 수 있을까요? 저는 이들도 지금 하느님의 품에서 안식을 취하고 있을 것으로 믿습니다.”

그는 소설 속에서 순교를 예찬하지도 배교를 변명하지도 않았다. 다만 소설에 대해 설명하며 “그 잔인한 매를 끝까지 견디라고만 강요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일종의 야만적인 행위”라고 덧붙인다. 김씨는 이 소설이 ‘인간의 나아갈 길’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고 재차 강조한다. 다만 ‘인간의 모습’을 그렸다고.

15년 전 김씨는 경기도 일산으로 이사했다. 일터와 집을 오갈 때마다 마주하는 절두산성지의 모습은 늘 그를 짓눌러왔다. 자연스럽게 성지를 찾았다. 성지 바위에 손을 대는 순간 민초들의 아픈 비명들이 들려오는 듯했다. 이후 오랜 시간, 순교에 대한 소설을 써야 한다는 생각을 밀린 숙제처럼 등에 지고 있었다.

“삶은 중요한 것이라고 말해주고 싶었습니다. 배교이거나 순교이거나 모든 인간의 삶은 경건하고 소중한 것입니다.”

특히 그는 “조선시대 ‘좀 배웠다’ 하는 사람들은 세상의 이치와 까닭을 다 아는 듯 떠들어댔지만, 정작 스스로 실천하진 않고 모든 무거운 짐은 민초들에게 떠넘겼다”며 “실상 현대 지식인들의 모습도 별반 다르지 않다”고 지적한다.

이 소설을 쓰기 위해 그가 들인 공도 만만찮았다. 우선 소설 내용과 관련된 성지는 모두 몇 번씩 순례했다. 가톨릭대사전 전 권뿐 아니라 각종 박해 관련 책자와 교회 사료들을 철저하게 탐독했다. 스스로도 한국교회가 오랜 시간 노력해 펴낸 각종 양서들이 소설 집필에 큰 도움이 됐다고 강조했다.

“교회사 관련 자료들을 보면서 하느님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겠구나 생각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존재한다는 것은 인간에 내재된 영성의 표현을 알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살아있는 인간의 모습, 인간의 삶 안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인터뷰 내내 김씨가 문인으로서 가장 중요한 자질을 갖췄다는 생각이 강하게 스며들었다. 그는 ‘인간’ 본연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씨는 “이웃을 사랑하는 진리를 알아차리는 힘이 바로 영성”이라며 “초기 교회 신자들도 교회의 난해한 교리에 감동한 것이 아니라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단순 명료한 진리, 교회가 강조하는 인간에 대한 관용에 감동한 것”이라고 전했다. 그리고 자신의 소설은 “이러한 진리에 감동한 민초들의 모습을 그린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고 역설한다. 또한 그는 “정약용은 적극적인 배교를 한 인물이지만, 배교라는 것은 하느님의 존재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개인의 선택으로 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김씨는 유아세례를 받고 서울 돈암동과 혜화동본당 복사단으로도 활동한 적극적인 신자였다. 그런데 군대에 다녀오고 세파에 찌들려 살다보니 시나브로 성당과 멀어졌다고 토로한다. 특별히 개인적으로 문제를 안고 있거나 교회에 실망해서도 아니었다. 그런데 ‘냉담’이라는 단어가 아픈 바늘이 되어 다가왔다. ‘냉담자’라 불리며 심한 차별을 받는 듯한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고 말한다.

이번에 책이 출간된 직후 김씨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절두산성지에서 봉헌된 미사 참례였다. 꼭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은 마음에 자연스럽게 발걸음이 옮겨졌다.

“미사를 봉헌하는 내내 나는 역시 성당으로 다시 와야 할 사람이구나 생각했습니다.”

김씨는 “흑산은 세속 안에서 신앙을 사는 모습을 그리는데 멈췄다”며 “이것이 내 소설이 지닌 종교적 한계”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세상의 어떤 고난도 없어지거나 뛰어넘을 수 없으며, 그것을 없애달라고 비는 것은 어리석은 신앙”이라며 덧붙인 그는 오늘도 강철 같은 의지로 스스로의 일상을 통제하며 ‘날마다 반드시 새로워지는 필일신(必日新)’ 일상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 장편소설 「흑산」은

순교·배교한 각 인물 갈등 그려

소설가 김훈이 베스트셀러 「남한산성」 이후 4년 만에 새로 낸 장편소설이다.

「흑산(黑山)」은 18~19세기 조선의 사회적 전통과 충돌한 천주교 지식인들의 내면, 부패한 관료들의 학정과 신분질서의 부당함에 눈을 떠가는 백성들의 모습을 여실히 그렸다. 소설에서는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순교한 인물, 거침없이 배교한 인물을 통해 현세와 초월적 세계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간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내용은 배교자 정약전과 그의 조카인 순교자 황사영의 삶과 죽음에 방점을 찍고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정약전과 황사영의 이야기를 한 축으로 조정과 양반 지식인, 중인, 하급 관원, 마부, 어부, 노비 등 20여 명이 넘는 다양한 계층의 등장인물들이 이야기 구조를 엮어내는 것도 이 소설만의 특징이다. 조선시대 민초들의 참상은 그야말로 소름 끼치는 묘사력으로 그려지고 있다.

주정아 기자,사진 서상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