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들려오는 빛] 50. 제5장 3

글ㆍ지요하, 그림ㆍ유대철
입력일 2011-06-30 수정일 2011-06-30 발행일 1984-12-25 제 1436호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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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실 테죠、속으로 말하며 기섭은 씁쓸히 웃음을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씁쓸한 웃음과 쓸쓸해 뵈는 모습 때문인지 술집 여주인은 잠시 그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걔 때문에 우리 집에 자주 왔었던건 기억이 나는데…걔와 무슨 사연이 있었우? 개를 볼려고 오늘 이렇게 온 거요?』

눈을 빛내며 물었다.

『월남에 갔다 와서 오늘 제대를 했어요. 제대증을 탄 부대가 가까운 곳에 있어서、집에 가는 길에 그냥 한번 들어봤지요. 옛날생각도 나고 해서…』

기섭은 짐짓 빙긋이 웃으며 대답하였다.

『걔와 정도 나누고 가깝게 지낸것도 기억이 나요. 두사람만의 비밀스러운 무슨 깊은 사연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설마 걔와 장래를 약속했다든지 그런 무슨 고차원적인 사연이 있은건 아니겠지요?』

술집 여주인은 뭔가 깊숙히 짚히는 느낌이 있기 때문인지 조금은 수다스럽게 물었다.

『왜요?』

이번에는 기섭이 눈을 빛내며 술집여주인을 바라보았다.

『이런 데를 나돌아다니는 애들이라고해서 다 나쁜건 아니고 그것도 사람 나름이겠지만、걔는 좀 문제가 있는 아이예요. 그런문제야 뭐 사실 따지자면 아무것도 아닌것이긴 하지만요. 이런데로 떠돌아다니는 애여서라기 보다도、걔는 원래 질이 안좋은 애니까요、걔와 나눈 정같은건 깨끗이 잊어버려요. 그런 정이야 뭐 이런데서는 흔해빠진것 아니겠어요?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공연히 상대방을 넘겨 짚고서 괜한 소리를 하는것 아닌지 모르겠지만…그래도 생각이 나는게 있어서하는 소리예요.』

그리고 술집 여주인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약간의 수다스러움과는 달리 더 말을 하지않으려는 듯한 빛이었다. 그리고 중년의 그 여인은 무슨 짐작같은 것을 지니고 있는 듯한 본새였다. 그러니까 그 짐작같은 것을、생각이 나는것을 구체화시키고 확대시키고 확인하는 등의 짓거리를 하지않으려는 듯한 몸짓인 것이었다.

기섭은 미묘하고 선명하게 그런 느낌이 짚혔다. 그리고 그는 그 순간 왕고참의 모습이 떠올랐다. 왕고참의 존재가 강하고 환하게 의식되어졌다. 술집 여주인에게 그사람 왕고참에 대해서 묻고싶은 마음도 강하게 떠올랐다.

그러나 기섭은 그것을 꾹 참았다. 냉정하고 침착해야 한다는 생각이 자신을 꽉 움켜잡는것을 느꼈다. 오늘은 그자신도 더이상 말을 하고싶지 않은 것이었다.

그래 오늘은 이쯤에서 멈추자. 더이상 무엇을 알려고 해서는 안된다. 더이상의 무엇을 알게된다면 나는 그만 엄청난 충격과 비감과 그리고 악독한 마음 속으로 휘말려들지도 모른다. 모름지기 침착해야 한다. 앞으로 천천히 천천히….

술집 여주인에게 짐작되는것이 있고 생각나는 것이 있을진대 정녕 기섭자신이 냉정해야할 일이었다. 그리고 기섭은 그때 문득 자신의 냉정함과 침착함、자신의 마음을 느끼고 다스리는 면밀함、그리고 자아인식 능력 등을 깨닫고 그 놀라움에 몸을 떨었다. 어떤 개명과 개화의 빛살같은 것이 자신에 들어찬 듯한 실로 강한 느낌이었다.

그때 성당의 저녁종소리가 그에게 들려왔다.

<끝>

글ㆍ지요하, 그림ㆍ유대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