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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나도 사제의 길을 - 오기선 신부 사제생활 50년의 회고] 78. 성인의 유해

입력일 2011-06-30 수정일 2011-06-30 발행일 1984-08-26 제 1419호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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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才에 새남터서 순교한 백神父
유해 서로 모실려고 다투기도
佛고향에 모셔졌다가 되돌아 와
聖 유스또 브르뜨니애르 백 신부는 1864년 5월 21일「빠리」외방전교회 성당에서 사제서품을 받았다. 그때 동기생으로 도리 김 신부、볼리외 서 신부、위앵민 신부가 있었다. 그들은 젊디젊은 사제로서 한 인간으로서 고향산천과 부모형제를 생이별하고 수억 만리타국으로 전교를 떠나게 되었다. 1865년 5월 충청도 내포에 동기사제 세 사람과 함께 도착한 백 신부는 먼저 모래사장에 무릎을 꿇고 입을 맞추었다. 눈물이 주르르 흐르는 기쁨에 가슴이 부풀어『오! 주님、감사합니다. 마침내 제가 그리던 꿈의 고향에 첫 발을 내딛었읍니다』하고 기도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꿈을 채 펼치기도 전에 1866년 2월 25일 체포당해 1866년 3월 7일 28세로 꽃잎 같은 선혈을 뿌리며 순교하고 말았다. 김 신부 서 신부 장 주교와 함께 새남터 백사장에서 참수된 것이다.

순교 후 6개월이 지나 새남터에 묻힌 유해를 박순집(朴順集)베드로씨가 와고개(註=瓦峴ㆍ현 군인교회가 서 있는 용산 우체국뒷산)로 비밀리에 안장 했다.

세월은 무심하게 흘러 33년이 지난 1899년 10월 30일에야 용산신학교 뒷산 성직자묘지로 이장되었고、1900년 9월 10일 명동대성당 지하실 순교자 유해 안치소에 봉안케 되었다. 그런데 복음의 씨를 뿌리기 위해 이 땅에 와서 고귀한 목숨을 바쳤던 백 신부의 유해가 그만 프랑스 고향「디종」으로 모셔져 가버린 것이었다.

필자가 우리 교회사연구를 시작하면서 그 유해의 경위에 대해서 조사해 보았다. 처음엔 막막했으나 교회사교수인 삐숑 신부、한기근 바오로 신부、김윤근 요셉 신부께 여러 얘기를 듣고서야 겨우 알아낼 수 있었다.

사실의 내용인즉 聖人백 신부의 동생 크리스띠앙 브르뜨니애르 신부가 형의 유해를 고향 땅으로 돌려달라고 신청해왔다는 것이다.

이에 뮈뗄 민 주교는 『이 땅에서 순교한 분의 유해는 이 땅에 봉안해야 한다』고 일언지하에 거절해버렸다. 그러자 브르뜨니애르 신부는「빠리」외방전교회 총장신부께 청원했다. 역시 그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도 브르뜨니애르 신부는『기어이 형님을 모셔오고 말테다』하면서 직접 교황청에 청원을 내었다. 이리저리 교섭하는 동안 1년이 지나고 1911년 8월 5일 깜짝놀랄 전갈이 서울에 떨어졌다. 그것은 교황 삐오 10세 당시 국무성장관 메리 추기경의 명령서가 떨어진 것이다. 『크리스띠앙 신부 요청대로 백 신부의 유해를 인도해주어라』는 내용이었다.

이 명령서를 들고 백 신부의 조카 해군대위와 드 룀꾸르 후작(侯爵)이 인천에 배를 대고 그날로 유해를 받들어 프랑스로 모셔갔다.

그리하여 백 신부의 유해는 1911년 11월 9일 생시에 복사를 하던 남작전용성당의 가족묘에 안장됐고 간단한 이력과 이장경위를 새긴 동판이 무덤위에 얹혀졌다.

필자가 1972년 11월 초에 백 신부가 살던 성(城)과 그 안의 남작전용성당엘 가게 됐는데 순교자의 유해를 뵈오니 가슴이 설레었다. 주의 부르심을 따라 먼 이국 한국 땅으로 와서 기꺼이 목숨을 바치셨던 그 유해만 고향에 돌아와 묻혀 있는 순교사제 앞에 목이 메일 수밖에 없었다. 그때 성당을 관리하던 유스또지빌니엘 신부가 자기 조상어른이라 하면서 유해의 내력을 친절하고도 간곡하게 말해주었다. 아울러 사교를 복사까지 해주었다.

그 후 27년이 지난 금년 조상이 성인에 오르는 시성식에 바로 그 신부가 직접 와서 필자와 지나간 사연을 되새기며 감개무량해했다.

그 이유는 1968년 10월 6일 병인박해 순교한 분들과 함께 백 신부가 복자품에 오를 때 그 유스또 지빌니엘 신부가 원 주교께 백 신부의 유해(가장 큰 부분)를 전달했던 것이다. 1947년 8월 12일 프랑스에서 원 주교께서 타계하시자 전해광(全海光)신부가 원 주교의 소장품을 정리하다가 백 신부의 유해를 발견했다. 그 후 백 신부의 친척후손인 요한 그랭깡 강진수 신부 (현 유성본당 주임)가 유해를 필자에게 모셔와 절두산 성당 지하 성해 봉안실에 안치했다. 도중에 분실되기도 했으나 박희봉 신부가 다시 찾아 봉안실에 모셨고 지난 5월 3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고달팠던 聖人의 유해 앞에서 기도를 하셨다.

머나먼 이국땅에서 애틋한 나이에 순교했고 다시 몽매에도 못 잊는 부모님 곁으로 갔다가 다시 전교지로 와서 우리 그리스도의 백성을 지켜주고 있는 聖유스또 브르뜨니애르 백 신부. 아、그동안 온갖 곡절을 겪은 그분의 유해 앞에서 다시금 옷깃을 여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