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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메시지 해설] 8. 부산근로자 농어민만남

오경환 신부ㆍ서울가톨릭대교수
입력일 2011-06-30 수정일 2011-06-30 발행일 1984-07-15 제 1414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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勞動은 창조사업의 계속이자 완성
인간 존엄성 더해줄 때 가치있어
「그분」안에서 용기와 의욕 갖도록 격려
교황은 근로자와 농어민을 향한 강론에서 우리 실정에 적절한 말씀을 하셨다. 한국의 근로자와 농어민의 과거의 경험과 현재의 실태를 교황이 상당히 정확하게 알고 계시다는 대목이 서너군데 발견된다. 그 강론을 일곱가지 점으로 나누어 고찰해볼 수 있는데 그 하나하나를 강론의 순서를 따라가며 되새겨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첫째로、노동의 의미는 깊고 많다는 것이다. 근로자와 농어민처럼 많은 일을 하는 이들이 그 의미를 아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교황은 노동의 의미를 자세히 설명하셨다. 하느님도 세상을 창조하실 때 일하셨으므로 노동은 그 분을 닮는 길이다.

『땅을 채우고 이를 정복하라』는 명령에서 하느님은 사람이 창조사업에 참여하기를 명하신 것이기에、노동은 그 창조사업을 계속하고 완성하는 것이다. 인류의 업적인 예술、과학、문화와 기술도 사람이 하느님을 닮아가고 그분의 계획을 실현하는 표시이고 하느님의 위대하심의 표시이다. 인간의 노동이 창조사업의 계속이고 따라서 위대함은 예수님에 의해서 더욱 강조되었다. 예수님 자신이 근로자였을 뿐 아니라 그 제자들도 어부와 근로자였고、그분은 늘 농군ㆍ어부ㆍ근로ㆍ상인의 활동을 예로 들면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두번째로、교황이 지적하신 것은 일하는 사람이 그 일의 결과와 산물보다 더욱 귀중하다는 점이다. 인간의 노동은 무척 힘들고 궂은일이더라도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이기에 존엄한 인간의 일부이고、인간의 유익과 존엄성을 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노동의 원천과 목적이 존엄한 인간인 까닭에 노동은 귀중할 수밖에 없다. 큰 도시、신기한 콤퓨터、거대한 국가조직도 인간노동의 산물에 불과하고、인간에게 유익하고 존엄성을 더해 줄 때에만 가치 있는 것이다. 제2차「바티깐」공의회의 말대로、인간의 노동 중에서 물건과 기술을 만드는 노동보다는 정의와 형제애와 인간다운 사회질서를 세우려는 노동이 더욱 값진 것이다.

문제는 인간노동을 그 산물보다 위에 두는 가치질서가 인정되지 않고 노동과 노동자를 그 산물인 물질적 도구와 같은 것으로 취급하는 데에 있다. 이것은 비극적이고 크게 그릇된 가치전도이다. 교황은 여기서 자본주의의 노동관을 배척하고 있다.

세번째로、교황은 인간역사에 노동자와 자본가의 충돌이 너무 많았음을 지적하시고 개탄하고 있다. 이러한 갈등은 인류의 비극이었고 개인과 가족에게 고통을 가져왔다. 이 갈등은 세상에 자본가와 노동자가 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기 보다는 노동에 대한 그릇된 이해와 노동의 존엄성을 인정하지 않는 그릇된 노동관에 그 원인이 있다고 교황은 본다.

그러나 자본가에 대한 노동자의 극단적 투쟁을 추겨 올리는「이질적 이념 체제」즉 공산주의를 도입하는 것이 문제해결의 길은 결코 아니다. 그것보다는 노동의 존엄성을 인정하면서 한국전통과 문화에 적합한 노사관계를 모색하고 발전시키는 것이 첩경일 것이다.

네번째로、교황은 한국에 고유한 노사관계가 가져야 할 몇 가지 특징을 지적하고 있다. 그것은 우선 『근로자에게 생산과 이득의 조직과 경영이라는 측면에서 더 큰 몫을 맡기는 것』이다. 교황은 근로자의 경영참여의 폭이 현재보다 넓어져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한국에 『이런 방향으로 속선 하는 움직임이 있다는 것을』안다고 했다.

그 노사관계의 다른 특징은 『기업성공의 혜택을 근로자 자신이 받도록』하는 것이다. 기업이 성공해서 순이익이 클 경우에、근로자는 계약된 임금 외에 그 큰 이익의 일부를 어떤 형식으로든 받을 권리가 있는 것이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하지만 한국에서는 충격적 사상으로 들릴지 모른다. 그리고 노동자는 자신이 사회발전에 기여한다고 느끼고 만족해야한다. 참여의식을 주지 못하고 소외감을 산출하는 노사관계에는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다섯번째로、교황은 노동에는 노고와 고통이 꼭 따르기 때문에 노동의 영성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다. 노동의 영신적 의미를 깨닫기 위해서는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신비의 빛을 받아야 한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순종의 결과가 부활이었음을 아는 것은、노동에 따르는 고통의 의미를 찾는 데에 중요하다는 것이다.

노동의 고통과 노고를 당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에 동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이 부활을 가져왔듯이 인간노동의 노고와 고통도 인간에게 구원과 승리를 가져올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그래서 만약 우리가 예수님이 자신의 수난과 죽음을 당하던 자세와 마음을 본받아 노동의 노고와 고통을 견디어내고 받아들인다면 인간노동은 하느님나라가 임하게 하는 데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

여섯번째로、교황은 가톨릭노동청년회와 가톨릭농민회의 고생과 용기와 인내를 알고 있다고 하시며 격려하였다. 『무관심과 오해와 심지어는 시달림 앞에서도 동료근로자와 농민의 권익을 신장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투신하는 그리스도신자로서 여러분은 인내와 용기를 가지고 십자가를 져 왔읍니다』라는 문구가 그것을 입증한다. 전남 함평과 안동의 고구마사건으로 인한 농민회의 투쟁과 JOC회원에 대한 부당해고와 불랙리스트 사건을 교황이 알고 있다는 말이라 풀이된다.

또한 교황은 산상성훈은 가난한 이와 억눌린 이를 위한 격려의 말씀이란 것을 볼때 근로자와 농어민에 대한 예수님의 관심이 지극하다는 것을 알고 그분 안에서 용기와 의욕을 가지라고 격려하였다.

교회의 마음과 관심도 그들에게 특별히 쏠리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마지막으로、교황은 인간 존엄을 찾고 인권을 촉진하며 더 나은 세계를 이룩하는 일에 매진하라고 당부하였다. 이 일을 하자면 과거처럼 오해와 무관심과 심지어는 시달림을 당할 것이지만、근로자와 농어민 자신뿐 아니라、그들의 자녀와 후손을 생각해서 중단할 수 없는 일이라고 강조하였다.

교황은 정의실현과 인권을 신장하는 일에 노력하는 이들이 취할 방법도 말씀하였다. 그 방법이란 「그분의 이름으로、그리고 교회와 함께、평화롭고 떳떳한 방법으로」계속하는 것이다. 폭력적이고 비겁한 방법이 아니라 평화롭고 정당한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 그리고 교회와의 유대를 유지해야 한다. 교회의 가르침을 따르면서 주교와 사제와의 유대를 맺어야 한다. 이 말씀은 주교와 사제가 근로자와 농어민의 이런 노력을 적극 지원해야 한다는 뜻도 담고 있다.

오경환 신부ㆍ서울가톨릭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