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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나도 사제의 길을 - 오기선 신부 사제생활 50년의 회고] 74. 비운의 부자

입력일 2011-06-30 수정일 2011-06-30 발행일 1984-07-01 제 1412호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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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에 충성했던 아버지 李익운
자신의 목숨살리려 아들에 死藥내려
참회의 눈물흘리며 아들곁에 묻혀
父親 출세욕에 희생당한 소년 李요한
샤를르 달레 원저(原著)한국천주교회사 상권 615쪽을 펴보자. 이명호(李明鎬)와 이익운(李益運)이 한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사실은 부자지간으로 순교자인 아들 이명호의 행실을 박해자인 아버지 이익운의 행적으로 잘못 기록된 것이다. 그러면 2백여년전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이명호의 죽음에 대해서 밝혀보기로 하자.

2백여년전 영조 때 당시 시파ㆍ벽파간 당쟁이 치열했다. 그 싸움판 틈에 사도세자가 희생된 때의 일이다. 영조 11년 즉 1735년에 영조계비 정순왕후의 사주를 받고 벽파가 들고 일어나 세자를 제거하고자 하였다. 이에 시파는 『부왕이 세자를 죽이게 하다니 천인공노할 노릇』이라고 강경하게 맞섰다. 시파들은 대개 실학자들이었고 벼슬에서 스스로 물러난 남인들 중심이었다.

그중에 태사로서 예조판서로서 사도세자에게 충성을 다하던 이익운이란 사람이 있었다. 연안이씨로 자는 계수(季受) 호는 학록(鶴麓)이라 했다.

세자가 뒤주 속에서 『아이구 목마르다』『덥다』하며 애절히 부르짖는 소리에 남몰래 부채를 뒤주 틈에 넣어주고 우유죽같은 제호탕을 넣어 준 사람이 바로 이익운이었다. 당시 이익운은 예조판서였는데 이 사실이 밝혀져 벼슬이 떨어지자 부랴부랴 양평군 옥천면 용천리 집으로 돌아갔다. 때는 정순왕후가 천주교인을 더욱 박해、삼천리강산을 피로 물들이고 있는 중이라 이익운은 16세 된 맏아들 명호가 열심한 천주교인이란 것만으로도 자신의 목숨이 부지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이익운은 황급히 고향으로 내려갔고 아들을 족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명호는 양주군 양근땅에서 실학파 학자들이 천주교에 대거 입교하는 기회에 요한이란 이름으로 영세를 받았다. 유일무이한 천주님을 대군대부로 모셔야 한다는 원칙아래 성인전과 성경을 탐독해가면서 자신을 성화시켜나갔다. 사치를 멀리하고 험한 성격을 온순하게 만들고 세속적인 젊은이들 틈에서 발을 빼어 주일이면 종일토록 다른 교우들과 교리를 논했다. 우매한 이를 가르치고 성경과 기도서를 넘겨주며 그들도 자신과 함께 성인되는 길로 나가다가 주의 안배라면 치명까지라도 하자고 손을 십자형으로 모아 맹세까지 하였다.

이익운은 집에 들어가자마자 호령하며 이명호 요한을 매질했다. 천주학 근처에는 얼씬도 말라는 것이었다. 그러자 이요한은 『아버지! 제가 한번 알아 모신 천주님을 어떻게 배반하겠읍니까』라고 하며 하염없이 울었다.

서울에서 이익운의 온 집안을 뒤지고 다니던 포졸들이 곧 들이닥친다는 정보를 들은 이익운은 다급하게 되었다. 그들에게 『자기는 천주학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걸 증명해야만 했다. 급기야 그는 사약을 태워 아들을 죽이기로 했다. 종들을 시켜 아래위턱을 잡아 입을 벌리게 하고 사약을 자식의 입에 부어넣었다. 그래도 양심은 있었던지 약사발이 부어지는 동안 이익운의 손이 사시나무처럼 벌벌 떨리었다 한다. 자식을 죽여서라도 목숨을 보전하고 벼슬길을 지키려 했던 비정한 아버지、정조가 들어서자 이익운은 사도세자께 충성을 다한 덕으로 경기감사로 벼슬을 받고 다산 정약용 선생의 설계도에 의해 수원성곽을 쌓아올리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수원 화산(華山)에 사도제자의 능、융능(隆陵)을 만들고 정조가 부친능 참배에 편리하도록 수원 세류동 끝에서 능사이의 큰 시내 위에 순화강암으로 돌다리(註=대왕교라고 부름)를 놓았다 한다. 그러나 정조가 갑자기 승하하자 11세 된 순조를 왕으로 옹립한 정순왕후의 순에 의해 예조판서의 벼슬도 뜬구름같이 날아갔고、천주학을 하는 자식을 죽인 공으로 참수는 겨우 면하였다는 것이다.

1817년 6월 26일、69세의 일기로 마침내 그 이익운도 임종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는 유언하기를 『내 어찌 자식을 죽이고 조상이 묻힌 종친산(註 충청도 신창소재)에 묻히길 바라겠느냐. 내가 죽인 자식 곁에 묻어다오』라고 하며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아버지에 의해 뒤주에 갇힌 사도세자를 불쌍히 여겨 보살피던 사람이 천주학을 한다고 자신의 아들을 죽여야 했으니 목숨과 벼슬이 무엇인지 아이러니칼하기 그지없다.

비운의 부자 그 무덤들은 지금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 용천2리 산비탈에서 다 허물어진 상태로 비바람을 맞고 있다. 가련하기 짝이 없는 순교자 아들 앞에 참회하는 아버지로서 통곡한지 어언 2백여년. 그 6대손인 이만희 안젤라 할머니가 6년 전부터 이 사실을 필자에게 얘기했고 1984년 5월 26일에 현지답사를 하고 이 글을 엮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