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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그는 누구인가?] 30. 역사안에서의 교황 19. 교황청과 한국교회

최석우 신부·한국교회사연구소장
입력일 2011-06-30 수정일 2011-06-30 발행일 1984-04-22 제 1402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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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교황 관심 끌어
바오로 6세때 한국과의 외교 수립
조선교구 설정으로 정식관계 맺어 
한국교회는 그 기원이 아주 기묘하고 또 그 발전도 특별해서 유달리 역대 교황들의 관심을 끌게 하였다. 역대 교황중에서도 세계포교에 특별한 관심을 나타낸 교황들은 자연 한국교회에 더욱 많은 관심을 나타냈다.

교황청은 한국교회가 창설되기 이전에 이미 한국포교에 관심을 표명했고 교회가 창설된 이후 더욱 깊은 관심을 보인 것은 사실이지만 엄격히 말해서 한국교회와 교황청과의 관계는 1831년 조선교구(정확히는 조선대목구)의 설정에서 비롯되었다.

조선교구 설정을 먼저 유발시킨 것은 물론 한국교회측이었다. 한국교우들은 두번씩이나 교황에게 서한을 보내고 선교사의 조속한 파견을 요청했을 뿐만 아니라 선교사의 신변보장도 아울러 요구했다.

그러나 한국교우들의 이러한 요청은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때(1831~1846)에 가서야 실현될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세계포교에 유달리 관심을 가진 교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국무성 장관으로 있을 때부터 한국교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빠리」외방전교회와 연락을 취하기 시작하였고 1831년 교황위에 오르자 즉시 한국교회를「빠리」외방전교회에 위임하고 동시에 한국교회를「북경」교구에서 분리하여 독립된 교구로 승격시켰다.

조선교구 설정에 이어 한국교회에 대한 교황청의 특별한 배려는 1925년 로마에서 거행된 한국순교자 79위에 대한 시복식에서 나타났다고 생각한다. 비록 짧은 역사이지만 누구보다도 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한국교회가 하루빨리 그들 순교자들에게 목자의 영광된 시호를 주고싶어했던 것은 극히 당연한 숙원이었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이런 숙원은 80여년만에야 성취될수 있었으니 그것은 이 방면에 특별한 관심을 가진 교황 삐오 11세(1922~1939)를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삐오11세는 종교생활을 심화시키려는 염원에서 그의 재위기간중 무려 5백명에 대한 시복식과 32명에 대한 시성식을 거행하였다. 이와 같은 교황정책의 일환에서 한국순교자에 대한 시복식도 실현될수 있었던 것이다.

삐오11세는 현대교황중 위대한 교황의 한사람일 뿐더러 포교교황으로서도 유명하다. 그는 무엇보다도 포교지교회를 現代化함으로써 포교지의 조속한 발전을 시도하였다. 그의 이러한 정책으로 말미암아 이웃중국과 일본교회와 더불어 한국교회에서도 많은 것이 현지화되기에 이르렀다.

1919년 일본에 처음으로 교황사절이 파견되고 또 이 교황사절이 한국교회의 교황사절을 겸임함으로써 한국교회에도 처음으로 교환사절이 파견되었다.

1920년 원산교구를 위시하여 평양ㆍ연길ㆍ전주ㆍ광주ㆍ춘천등 여러교구가 설정되었는데 삐오11세의 재위기간중 세계의 교구수가 배가 되었다는 사실에서 이렇게 한국에도 여러 교구가 설정되기에 이른 배경을 이해할 수 있을것이다. 특히 우리는 1937년의 전주교구(정확히는 전주지목구)가 최초의 방인교구였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1926년 최초로 6명의 중국인 주교가 탄생한 반면에 한국에는 아직 방인주교가 탄생될 수도 없었을지라도 방인교구는 탄생될 수 있었다. 1935년 최초의 방인수도회원「영원한 도움의 성모회」가 교황청의 허가를 얻었다는 사실도 삐오 11세의 현지화 정책에서 파악되어야 할 것이다.

1924년 일본과 중국교회에서 최초로 지역공의회가 열린데 이어 1931년에는 처음으로 한국에서 한국공의회가 개최되었다. 이 해는 마침 한국교회가 조선교구설정 1백주년을 기념하는 경축스러운 해였다. 교황청에서는 교황사절을 파견하여 한국공의회를 직접 주재하였다.

삐오11세의 현지화 정책중에서 가장 의의가 있는 것은 역시 제사문제의 완화일 것이다. 1935년 삐오11세에 의한 제사금지의 완화로 인해 중국을 위시한 한국ㆍ월남등 유교권의 교회들은 정통문화와의 불필요한 마찰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

삐오11세는「가톨릭액션」의 교황으로서도 널리 알려진 교황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이 운동이 널리 보급됨으로써 평신도 운동이 활기를 띠기 시작한 것은 실은 교황의 이런 정책의 덕택이었다.

교황청과 한국교회와의 관계에 있어서 가장 획기적인 사건은 1962년의 교계제도의 설정이 아닐 수 없다. 이웃 일본이나 중국교회와 비교하면 너무 늦은 느낌이 없지 않으나 뒤늦게나마 한국교회에 교계제도가 설정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교황 요한 23세의 현지화정책의 덕택이 아닐수 없다.

교황청과의 관계가 더욱 심화되고 나아가서 대한민국과 바티깐 시국과의 외교관계까지 수립되었다는 점에서 교황 바오로6세의 재위기간(1963~1978)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것 또한 그의 정책에서 이해될수 있다. 바오로6세는 특히 평화의 봉사를 위해 교황청의 외교활동에 치중했는데 그래서 그의 재위기간중「바티깐」주재 외교사절의 수가 배가 되었다. 1963년 대한민국과 바티깐 사이에 공사급 외교사절이 교환되기에 이르런 것도 실은 그의 외교정책의 일환이었다. 또한 1969년 한국교회에 처음으로 추기경 한명이 주어진 것도 실은 바오로6세의 추기경단의 국제화 정책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는 세번에 걸쳐 87명의 추기경을 임명했는데 한때 추기경수는 1백45명까지 되었다.

이제 교황 요한 바오로2세의 방한으로 한국교회와 교황청과의 관계가 그 절정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방한 역시 그의 정책과 관련시켜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것은 그의 세계적 사목여행의 일환이지만 동시에 지역교회의 교유한 전통에 대한 그의 깊은 이해에 기인한 것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 같다. 그는 누구보다도 교회전통을 존중시한다. 그는 폴란드교회가 인권에 관여하는 것은 비단 교회의 권리만이 아니라 동시에 1천년의 전통에서 오는 폴란드 교회의 권리임을 강조하셨다.

이런점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2세의 금번 한국방문은 오늘의 한국교회에 대한 방문만은 결코 아닐것이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한국순교자 103위에 대한 시성식에서 입증된다. 결국 교황 요한 바오로2세가 한국교회를 방문하게 된 결정적인 동기도 오늘의 교회를 이룩한 한국교회의 고귀한 전통에 대한 깊은 존경심이 아니었던가 생각한다.

최석우 신부·한국교회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