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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그는 누구인가?] 24. 역사안에서의 교황 13. 바오로 6세

최석우 신부·한국교회사연구소장
입력일 2011-06-30 수정일 2011-06-30 발행일 1984-03-11 제 1396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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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 복음의 여행자…교회 재일치에 열과 성 다해
선임교황 노선 강화
추기경단을 국제화
제2차「바티깐」공의회 완성
교황 요한 23세에 이어「밀라노」의 대주교 65세의 세자 요한 몬티니가 1963년 6월 21일 새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그의 교황 이름으로 바오로 6세를 택했다. 이보다 앞서 그는 6월 7일「밀라노」대성당에서 요한 23세의 추도미사를 지내고 난 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었다『우리가 이제 바라보아야할 곳은 과거도 아니고 요한도 아니고 그가 교회와 역사를 위해 제시한 지평선입니다. 그의 무덤이 그의 유산까지 묻을 수는 없고 그의 죽음이 그의 정신까지 죽일 수는 없읍니다.』

이말에 이미 암시되어있듯 과연 바오로 6세는 교황으로 당선되자 선임교황의 사망으로 중단된 공의회를 속개할 의사를 표명하고 또한 그것을 그의 교황직의 가장 중요한 일부로 지적했다. 또한 그는 공의회의 목표로 특히 교회의 자기이해의 심화、교회의 쇄신、전 그리스도교인의 재임치의 촉진、현대세계와의 대화 등 네가지 점을 내세웠다. 이리하여 제2차「바티깐」공의회는 이미 그해9월 29일에 제2회기가 개최되었고 이어 1964년 9월에는 제3회가、그리고 1965년 9월에는 마지막회기인 제4회기가 개최되었다. 요한23세에 의해 소집되었던 제2차「바티깐」공의회를 속개하고 마무리하는 것은 바오로 6세 교황에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그 나름대로 실현시켰다. 그는 제2회기를 개최하면서 선임자의 훌륭한 모습을 상기시킨 다음 이렇게 세 가지 질문을 했다.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어떤 길을 가고 있는가?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에 대해 그는 스스로 이런 감명 깊은 대답을 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유일한 원천이요 우리의 유일한 길이요 우리의 유일한 목표이다.』

바오로 6세는 1964년1월에 3일간 팔레스티나성지를 순례함으로써 교황 사상 성지를 찾은 최초의 교황이 되었다. 그는 교황식의 원천을 직접 보려했다. 팔레스티나는 베드로 사도를 길러내고 또한 그를 로마로 떠나보낸 거룩한 땅이다. 또한 그곳은 베드로가 주님으로부터 직접 교황직의 사명을 받은 성지이다. 그래서 바오로 6세는 그의 원천으로 돌아가서 유일한 원천이요 길이요 목표인 그리스도 구세주 앞에 겸허한 순례자가 되려했던 것이다.

또한 바오로 6세는 그의 세계여행을 통해 교황사에서 새장을 열었다. 이것은 동시에 그가 그의 교황명으로 택한 바오로 사도를 본받는 길이기도 했다. 그는 바티깐의 포로에서 해방되어 세계적복음의 여행자가 되려했다. 실제로 그는 1964년 인도「봄베이」의 국제성체대회에 참석한 것을 비롯하여 1965년에는 미국을 방문하고 국제연합에서 연설을 했고 1967년에는 파티마의 성모 1968년에는 콜롬비아의 국제성체대회 1969년에는 아프리카를 방문했다. 또한 1970년 말에는 테헤란ㆍ 세일론ㆍ 마닐라 ㆍ사모아ㆍ 시드니ㆍ 홍콩등지를 두루 여행했는데、특히 홍콩방문은 아주 상징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폐쇄된 중국국경에서 국경을 초월한 사랑의 보편적 메음에 소극적이었으나 그 후 분열에 대한 책임을 동감하고 일치의 대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요한 23세는 갈라진 형제들을 공의회의 옵서버로 초대했었다. 바오로 6세는 공의회가 폐회되기 직전 갈라진 형제들에게 『당신들의 출발은 우리로 하여금 공의회 이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고독을 느끼게 합니다』는 감격적인 말을 했다. 이때부터 교회의 최고지도자들의 상호 방문이 잦아졌다. 바오로 6세는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그 곳에서 그리이스 정교회의 총대주교를 만났다. 1966년에는 영국의 수석주교인 미카엘 램지 캔터베리 대주교가 바티깐을 방문했고 그 후 아르메니아、시리아、콜트교회의 총대주교들이 로마를 잇달아 방문했다.

1967년 7월 바오로 6세는 콘스탄티노플에서 비잔틴 교회의 책임자 아테나고라스 총대주교와 역사적인 회견을 했고、이보다 앞서 1965년에 이미 1054년에 내려졌던 상호간의 파문이 첨회되었으며 1967년에는 아테나고라스 총대주교가 답례 차 로마로 가서 바오로 6세와 직접 회견했다.

뿐더러 바오로 6세는 1969년 제네바의 세계교회협의회 본부를 방문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내 이름은 베드로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측의 아무 공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親交의 직책을 맡기셨다고 확신합니다』고 인사말을 했다. 그는 이 친교의 직책이 도리어 분열의 원인이 되고 또한 모퉁이돌이 도리어 장애물이 되었음을 같이 슬퍼했다.

공의회의 소집에서 이미 예측된 것이기는 하지만 바오로 6세는 교황의 자문기관인 세계주교시노두스를 1965년에 발족시켰다. 이 결정은 일찌기 로마교회사에서 볼수 없었던 일이었다.

바오로 6세가 추천한 일련의 개혁중에서 추기경단의 국제화는 대내적으로 큰 의미를 갖는다. 물론 추기경의 증원은 이미 그의 선임자에게서 시작된 것이지만 바오로 6세는 선임자의 노선을 더욱 강화했다. 그는 추기경의 수를 145명으로 크게 증원했다. 이것은 교회사상 일찌기 없었던 숫자이다. 그 후 그는 추기경의 수를 120명으로 조정하고 또 교황선거 연령을 80세 이하로 국한시켰다.

바오로6세의 사망 당시 즉 1978년추기경은 1백14명이었는데 그중 이탈리아인은 28명뿐이었다. 이 선거단은 1개월 간격을 두고 두번 교황을 선출했는데 먼저「베니스」의 대주교가 선출되었고、다음「크라코프」의 대주교가 선출되었다. 바오로 6세에 의해 추진된 추기경단의 가톨릭화는 4백여년의 오랜 전통을 깨고 마침내 비이탈리아인 교황을 출현시켰다.

최석우 신부·한국교회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