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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그는 누구인가?] 21. 역사안에서의 교황 10. 삐오9세

최석우 신부·한국교회사연구소장
입력일 2011-06-30 수정일 2011-06-30 발행일 1984-02-19 제 1393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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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바티깐공의회 소집
교황의 무류권 통과-교황령 종말 고해 
격변 속에서 중대한 사건으로 충만
참된 종교개혁의 실현을 위해 트리엔트 공의회를 소집하고 그것을 성공리에 마치게 한 교황들、특히 공의회의 결의를 실천에 옮긴 유명한 3명의 개혁 교황에 이어 17세기와 18세기에 걸쳐 교황 좌에는 그렇게 유명한 교황들이 나타나지를 못했다. 이 시기의 교황들은 모두 존경할만한 교황들이었으나 그 이전과 이후의 교황들에 비기면 아무래도 평범한 교황들이었다.

다음 19세기에 접어들면서 프랑스 혁명의 여파、이탈리아의 국민운동、자유주의 등으로 말미암아 교황 좌에 많은 변화가 일어나게 되고 또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이 시기의 교황들의 역사는 그것이 세계사에서 차지하는 의의는 고사하더라도 우리 한국교회사와도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에 특기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삐오 7세와 그레고리오 16세는 한국교회와 매우 인연이 깊은 교황이다.

그러나 이에 관해서는「한국교회와 교황청」이란 제목으로 따로 취급할 것이므로 여기서는 교황 삐오 9세(1846~1878)와 레오 13세(1878~1903)에 관해서만 언급하기로 한다. 역대 교황 중에서 가장 오래 교황 위에 머무른 삐오9세 때의 치세 32년간은 제1차「바티깐」공의회가 열리고 또 이 공의회에서 교황의 無謬權이 통과되고 또 교황령이 종말을 고하면서 교황이 자진하여 바티깐의 포로가 되는 등 격변 속에서 중대한 사건으로 충만했던 시기이다. 삐오9세에 대해 사람들은 처음에 많은 기대를 걸었었다. 상냥한 성격에 무엇보다도 자유주의자요 애국주의자로 통했다. 그는 교황령의 통치를 위해 헌법을 제정하고 민중을 정치에 참여시킬 정도였다.

그러나 1848년 반란이 일어나고、교황령의 수상이 과격파 혁명가들에 의해 살해되었을 때 교황은 도망쳐 피신하였고、이어 로마에서 또 반란이 일어나자 삐오 교황은 그의 태도를 바꾸게 되었다. 즉 그는 외국군대의 간섭을 요청했고、프랑스군대의 도움을 받아 로마와 교황령을 되찾은 다음 전제군주체제를 다시 채택했다. 그는 모든 자유주의적 사상을 비난하고 시민들에게 정치적 자유를 허용하는 헌법을 일체 거부했다. 이렇게 그는 반동의 심볼이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반란자들을 더욱 흥분하게 만들어 결국 교황령의 멸망을 초래했다.

그간 교황령은 이탈리아의 민족통일 운동가들에 의해 다 빼앗기고 로마밖에 남지 않았었다.

로마는 프랑스 군대가 주둔하면서 보호하고 있었다. 그러나 1870년 보물전쟁이 일어나자 프랑스 군대가 로마를 철수하게 되니 곧 이어 이탈리아 군대가 9월20일 교황령의 최후 거점인 로마를 점령했다. 이로써 1천 년간 존속되어 온 교황령이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교황은 모든 협상을 거부하고「바티깐」으로 후퇴하였다.

이탈리아의 새 정부는1871년 5월 13일 일방적으로 소위「보장법」(保障法)을 선포했다. 여기서 교황의 주권이 인정되고 일정한 연금이 보장되었다. 그러나 교황은 이러한 제의를 일축하고「바티깐의 포로」로 자처하면서 계속 항의했고 신자들에게 정치참여까지 금지했다.

삐오 9세는 교황령의 상실로 오히려 보편적 교황 직을 자유롭게 행사할 수 있게 되었음을 깨닫지 못한 것 같다. 교황이 교황령이란 영토를 갖고 군주 노릇을 하는 것이「나의 양을 치라」는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에 적합한 것일까、이런 질문에 중세기의 한 신학자는 이런 대답을 했다. 만일 교황이 세속사와 교황령을 포기하면 그는 정말 아버지(papa)로 불릴 것이고、모든 이의 아버지요 교회의 아버지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전쟁을 일으키지 않게 될 것이고 뿐더러 남이 일으킨 전쟁을 교황적 권위로 조정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예견되었던 챤스가 왔던 것이다. 그러나 삐오9세는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어쨌든 이제 교황령의 상실로 인해 교황 직의 외적、도덕적 영향이 커졌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교황령의 멸망과 때를 같이 하여 제1차「바티깐」공의 회에서 교황의 수위권과 무류성에 관한 신조가 선포되었다는 사실에서 뚜렷이 나타났다.

제1차「바티깐」공의회(1869~1870)는 삐오 9세 치세의 정점을 나타냈다. 그는 1854년에 성모무염시태에 관한 신조를 선포함으로써 이미 공의회의 소집을 암시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신조가 교황의 무류권의 방식으로 선포되었고 또 이 무류권이 베1차「바티깐」공의회의 최대의 테마가 되었기 때문이다. 10년후 교황은 공의회 소집 계획을 밝히는 동시에 소위「실라부스」(誤謬表)를 발표했다. 여기서 당시의 자유주의와 진보주의 등이 신랄하게 비판되었다.

삐오 9세는 마침내 그가 오래 전부터 계획한 공의회를 1869년 말「바티깐」에 소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공의회는 1년도 못되어 이탈리아 독립운동가들의 「로마」점령으로 중단되고 무기한 연기되는 비운을 겪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의회는 교황의 수위권과 무류성이란 최대의 두 의안을 의결하고 선포할 수 있었고 이런 점에서 제1차「바티깐」공의회는 그 기간이 짧았음에도 불구하고 세계사와 교회사에서 중대한 의미를 갖는 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이때 선포된 교황령 중에서 교황의 수위권과 무류성에 관한 요지는 이러하다.

베드로의 후계자이고 그리스도의 대리자이며 교회의 최고 우두머리로서의 교황은 전 교회와 모든 교구에 대해 완전한 주 교권을 행사한다. 이 권한에는 신앙과 도덕 문제만이 아니라 규율과 통치문제도 포함된다. 그러므로 모든 주교는 신앙과 도덕에 관해서뿐만 아니라 생활양식과 교회통치문제에 있어서도 교황에게 복종할 의무가 있다.

교황이 전 그리스도교진자의 우두머리로서 권좌에서(excathedra) 즉、책상 신앙과 도덕에 관해 어떤 발언을 하면 교황의 그와 같은 결정은 교회의 동의에 의존하지 않았다하더라도 그르칠 수 없고 또 변경될 수도 없다.

<계속>

최석우 신부·한국교회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