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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의 성지] 5. 서천교

윤강명 기자
입력일 2011-05-27 수정일 2011-05-27 발행일 1983-10-02 제 1374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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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자 조윤호 순교한 곳
부친도 순교복자품에
1866년 19세나이로 교수당해
현위치엔 돌다리 대신 콘크리트다리가
시절인연을 맞아 사자후를 토할 사나이의 기개를 키울 나이, 또 신혼의 단꿈에도 젖어 있어야 할 꽃다운 나이- 그러나 의외에도 빨리 닥쳐온 시절인연을 그는 놓치지 않았다. 그것은 바로 소년시절 그렇게도 열망했던 그리스도의 진리를 거역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떠한 옥고도, 어떠한 매질도 진리 앞에 겸허하기를 원했고 그 진리를 배반한다는 것이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젊은이로서 용납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를 따라 19세의 나이에 장하게 순교한 조윤호-그가 순교한 전주「서천교」는 오늘의 젊은이 안에서 상실돼가는「사나이의 기개」처럼 우리들의 시선 안에서 점차 사라져가고 있어 일부 뜻있는 이들의 안타까움 마저 자아내게 하고 있다.

순교의 피밭위에 건립된 한국교회의 모습을 그 어느 곳보다 진하게 접할 수 있는 전주교구 순교지의 하나인 서천교는 전라북도 전주시 다가동 다가교와 매곡교 중간에 위치해 있다.

이조말기 김제 정읍방면으로 통하는 길목의 역할을 담당했던 서천교는 결코 이 지방 천주교인들에게 생소하지 않았다.

서천교와 매곡교 중간에 위치, 정기적으로 선 장은 당시 박해로 산골에 은신하여 담배농사를 했던 신자들이 왕래했던 곳으로 신자들에게 있어서는 친숙한 곳이었다.

또한 현재는 총 연장 80mㆍ교폭 9m의 콘크리트다리로 변해있고 주변 역시 여인숙 촌으로 변모돼 있어 옛날의 모습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지만 1866년 당시만 해도 돌다리 근처에는 장꾼들의 내왕이 잦았던 곳이다. 이곳에서 조윤호는 장꾼들의 야유와 멸시, 그리고 소리 없는 격려 속에서 야멸찬 매질과 목 졸림으로 순교했다.

최양업 신부의 복사를 지냈고 숲정이에서 순교한 조화서(베드로)의 아들로, 또 1839년 순교한 할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은 탓인지 조윤호는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남달리 깊은 신덕과 성실한 교회규범준수로 주위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부인 이루치아ㆍ아버지와 함께 살면서 누구보다도 토론을 좋아한 조윤호는 포졸들이 들이닥쳐 피하라는 아버지 조화서의 신호에도 불구하고 함께 잡혀가 전주감영(현재의 전주대학병원자리)에 수감돼 심한 문초와 고문, 배교의 유혹을 받았다. 그러나 12월 13일 먼저 순교하러가는 아버지 조화서(베드로)를 보고 끝까지 순교의 영광을 누리도록 청했는가 하면 조화서 역시 같은 말로 아들을 격려할 정도로 신앙사수를 열망했으며 12월 23일 칼을 쓴 채 사슬에 매여 쓰러지며 일어서는, 옥터에서 서천교간 2km의 고행도 그의 열망을 끊을 수 없었다.

옥터에서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강요되는 배교를 끝내 거절하며「진리이신 하느님」을 오히려 설명하면서 마지막 순간에 제공된 술과 안주를「천주께서 만드신 음식」이라며 감사히 받기도 했다. 『너는 왜 죽으려고 하느냐』는 마지막 질문을『왕중의 왕이시며 만물의 어버이이신 그분을 끊으라고 하나 나는 그분을 끊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설파,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장꾼과 포졸들에 의해 발가벗기운채 2백여 차례의 곤장으로 살점과 뼈가 드러나는 아픔도 잠시, 조윤호는 포졸들에 잡혀온 걸인들에 의해 목을 졸려 순교했다.

걸인들에 의해 짚섬에 덮혀있다가 용머리고개에 가매장, 「신자구명과 옥바라지에 열성을 쏟은」오사현에 의해 유상리 막고개의 아버지 곁에 묻혔다.

이러한 조윤호의 열절한 신앙은 1968년 10월 6일, 숲정이에서 순교한 그의 아버지 조화서를 비롯한 6명 순교자들과 함께 복자의 반열에 드는 영광을 입게 됐다.

그러나 생활과 죽음을 통한 조윤호의 갸륵함은 아직도 확실하게 드러나지 못한 채「순교자전기」나「역사서」에도 숲정이 순교자에 포함돼있으며 어떤 책에는『시신을 서천교에 묻었다』고 표기돼있고 그의 순교일도 1866년 12월 13일로 오기돼있다.

1895년 치명일기 발간 후 1899년~1900년 시복대상자 수속을 위해 1896년 르 쟝드르(최창근) 신부가 수집한 보충증언록에 조화서의 친척인 조프란치스꼬가『조요셉은 아버지 치명 후 열흘 만에 서천교에서 치명했다』고 한 증언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조윤호가 순교한 장터는 1923년 동서남북문 시장합병으로, 또 서천교 역시 1890년 1950년 1968년에 재건돼 그 옛날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또한 전주교구신자 대부분도「서천교」는 알아도 그곳에서 19세의 한 젊은이가 신앙을 지키기 위해 외롭게 투쟁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모르고 있다. 따라서 전주교구 홍보국은 교구 내 성지순례안내 및 신자교육용으로 제작하는 슬라이드ㆍ카세트테이프에 서천교를 초록바위와 함께 취급, 신자들에게 널리 알릴 방침으로 있다.

서천교 밑에서 세상을 향해 절규한 한 젊은이의 소리를 긴 세월을 유유히 지켜온「물결인들 잊을 수 있을 것인가.」『당신의 아버지를 당신 아버지가 아니라 하더라도 당신의 아버지가 아닌 것이 아닙니다. 좋은 진리를 인식하고 진리를 따랐는데 어찌 허황된 것이라 저버리겠습니까?』

▲조윤호=요셉ㆍ19세 1866년 12월 23일 순교, 1968년 시복.

윤강명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