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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보는 한국교회 근세사] 34. 명도회관

윤광선ㆍ영남교회사 연구소
입력일 2011-05-27 수정일 2011-05-27 발행일 1983-08-14 제 1367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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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피정ㆍ신자교육위한 집회소
1910년 옛 「명도회」계승해 발족
1912년 3월 19일(성요셉 대축일)

이날은 맑고 깨끗한 이른 봄날이었다. 대구군(大邱郡) 서상면(西上面) 남산리(南山理) 225번지「앞고개」(읍내에서 남쪽 앞산「안지랭이」로 가는 길의 첫 고개) 길옆에 붉은 벽돌 벽에 함석지붕의 새로운 강당(講堂)이 세워진 이날 축성(강복)식을 갖게 되었다.

「명도회관」(明道會館)으로 불리운 이 건물은 사제들이 연례(年例)피정을 하고, 평소에는 신자들의 교육을 위한 강당으로 사용하기위해 건립한 집회소로서 「조선남방교구」(大邱代牧區)의 주교좌(主敎座)를 대구로 유치하기 위하여 당시 대구사회에서 후덕(厚德)한 실업가로서, 애국운동의 선도자로서 명망높았고 또한 삼촌 두 분이 순교자인 열심한 신자 서상돈(徐相燉=아우구스띠노) 명도회장이 그의 종묘원을 교구시설의 부지로 교회에 헌납한 땅1만여평(萬餘坪) 위에 맨 처음 건립된 양옥건물이다.

명도회(明道會)는 1795년 성직자로선 처음 입국한 주문모(周文謨=야고보,中國人) 신부가 북경의 「종교조합」(宗敎組合)을 본따서 조직한 평신자 사도직 활동 단체로서 한국교회역사상 가톨릭 액션단체의 시조(始祖)가 된다. 명도회는 성직자가 없고 전교 사업에 종사하는 이가 따로 없었던 우리나라 초창기 교회에 있어서 복음전파와 사도직활동을 훌륭히 해온 평신도 조직체로, 남녀의 구별 없이 회원이 될 수 있는 단체이며, 첫 회장은 남자회장 정약종(丁若鐘 M아우구스띠노 1801년 순교) 여자회장 강완숙(姜完淑=골룸바 1801년 신유교난(辛酉敎難)이 시작되기까지 5년간 많은 전교활동으로 이 땅에 복음전파에 큰 공헌을 했다.

그러나 그 후 백여 년간 박해시대가 계속되는 동안 자연해체가 되고 신교의 자유가 허용된 후에도 얼마동안 새로 조직이 되지 못했다가 1910년 4월 대구에서 옛날의 명도회를 계승하려는 새로운 명도회가 탄생하였는데 당시의 대구본당 주임 로베르(P.A. Robert 金保祿) 신부의 지도로 첫 회장에는 서상돈(徐相燉), 부회장 배석규(裵碩奎), 총무겸 지도강사 이근우(李根雨=요한), 총무 김규상(金圭祥=바실리오), 평의장 서병조(西丙朝=베드로) 등이 간부진이었다.

옛날의 명도회는 남녀교우가 다 참가할 수 있는 조직이었지만 새로 재건된 명도회는 우선 남자들만으로 노소(老少)가 다 같이 참여토록 되었으며 회합은 연(年) 2차의 정기총회를 비롯 임시총회ㆍ통상(通常)회ㆍ평의회 등으로 거의 매주일에 모임을 가졌고 회합에서는 성경연구 또는 교리문제 토론과 교회사업 협조문제가 거론되고 출석회원은 매회의마다 50~60명이었다.

교구가 설정되고 첫 교구장으로 부임한 드망즈(安世華) 주교께선 특히 평신도사도직 운동에 적극적인 지원과 장려로 주교관 신축에 앞서 명도회관을 먼저 건립하고 1912년 6월 20일 명도회를 전교구적인 조직으로 각 본당에 지회(支會)를 두도록 하는「조선남방천주공교 명도회」(朝鮮南方天主公敎 明道會)로 확장하는 한편 청장년들의 기염을 돕기 위해 음악부를 설치하고 취주악기(吹奏樂器) 30인조를 프랑스에 주문하여 악대(樂隊)를 편성케하여 연주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회관 동편에 정구(庭球)장을 마련하여 체육발전에도 큰 공헌을 했는데 당시 대구 체육계에서는 이 정구장을 「해성코트」라 했고 1923년 8월 26~27일 양일간 제2회 전조선정구대회가 명도회관 테니스 코트에서 개최되기도 했다.

윤광선ㆍ영남교회사 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