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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주님을 증거했다 - 시복후보 선조들의 신앙 발자취] 황사영

입력일 2011-05-27 수정일 2011-05-27 발행일 1983-07-03 제 1362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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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서 사건」으로 순교 
덕소 황사영은 초대 교회의 현황과 우리 신자들의 신앙심을 극명하게 표현한「황사영 백서」의 저자로, 영조51년(1775년)10대가 벼슬을 지낸 당당한 양반 가문의 유복자로 태어났다.

학문에서 뛰어났던 황사영은 16세의 어린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 세인을 놀라게 했고 정조로부터 어루만짐을 받는 특은을 입었다.

1790년 마재(현 경기도 양주군 능내리의 한부락)의 명문 가정의 정씨를 아내로 맞은 후 천주교에 눈을 떴다.

부인 정씨는 정약현의 딸로 정약현은 천주교회 창설의 중심인물인 정약전ㆍ약종ㆍ약용의 맏형이었다.

마재와 처가를 오가며 한역 서학서를 접하고 교리를 배운 황사영은 알렉산델이라는 영명을 받고 입교했다.

「천주교가 세상을 구하는 양약」이라고 믿은 황사영은 입교 후 교우들의 자녀에게 글과 교리를 가르쳤다.

1795년 주문모 신부가 이 땅에 들어오자 최창현과 죽음을 같이하는 死友가, 이가환ㆍ이승훈ㆍ권철신 등과는 생명을 걸고 행동을 함께하는 혈당(血黨)이 되기로 언약했다.

1801년 일어난 신유박해 때 이승훈ㆍ정약종ㆍ최창현ㆍ강완숙 등 황사영의 사우ㆍ혈당 친구들이 죽음을 당하고 주 신부마저 순교하자 한국 교회는 혼란의 와중에 빠지고 말았다. 검거령이 내려진 황사영은 거센 박해의 불길을 피해 배론에 은신한 뒤 함께 피난한 김한빈으로 하여금 서울을 정탐케 했다.

「북경」교회에 우리의 사정을 알려 교회를 다시 소생시키기로 결심한 황사영은 밀사가 옷 속에 감출 수 있도록 얇은 명주에 쌀알 같은 작은 글씨로 이른바「황사영백서」를 제작했다.

1백21행 1만3천3백11자에 달하는 그의 백서는 당시 한국 교회의 소망과 황사영의 경륜ㆍ신앙심을 충분히 드러낸 값진 것이었으나「북경」을 오고 가는 밀사 옥천희가 국경에서 체포돼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옥천희의 검거로 마침내 배론에서 포승을 받은 황사영은 혹독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27세의 젊은 나이로 능지 처참형을 받았다.1801년12월10일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