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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보는 한국 교회 근세사] 24. 호남의 본당들 4. 진안 어은동 · 김제 수류

사진제공 해설=윤광선·영남교회사연구소
입력일 2011-05-17 수정일 2011-05-17 발행일 1983-04-17 제 1351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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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 어은동 - 프랑스 신부들 은거한 산골본당
김제 수류 - 호남 교회 초창기의 3대 원류
전주(全州) 순시를 마친 드망즈(安世華) 주교는 1911년 9월 26일 진안 어은동(鎭安郡與面隱洞天主堂)성당으로 순방길을 떠났는데 진안본당은 1900년에 설립되었으므로「고산되재」(升崎) 「나바위」전부보다는 본당(本堂)으로 서의 역사적 연류(年輪)이 10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병인(1866)년 대교난 후 10년 만에 새로 입국한 프랑스 신부들이 은신(隱身)전교한 우서 깊은 교우 촌과 박해 시대의 여러 공수(公所)들이 이 본당 관하에 있는 긍지 높은 산골 본당이다.

진안본당은 장수(長水)지방에「넙산리」「쌍암리」「대편리」「다랏리」「큰골」「깊은골」「덜먹리」「막남동」「법연동」등 9개 공소와 진안 지방에「고정대」「느랏」「반월리」「어은동」(魚隱洞)등 4개, 남원(南原)지방에「갈박리」부전리「엄나무정리」등 3개소 용담(龍潭)수침동 무주(茂朱) 「여우내」등 5개군에 걸쳐 18개소의 오랜 역사를 가진 큰 공소들을 포함하여 30개 공소에 신자 수 2천70명이며 교육기관으로 4년제「영신(永新)학교」를 경영하고 있었다.

안 주교 일행이 어은동 10리 밖에 이르렀을 무렵 해가 저물었는데「영신학교」학생들이 마중 나와 등촉을 밝히고 환영가를 부르며 제등행렬을 하여 주교님을 성당으로 모셨으며, 많은 교우들과 거리로 나와 연속하여 열렬한 환영을 했는데 각 공소에서 대표자들이 참여했음은 물론 1백여리 밖에 있는 연로(年老) 교우 등도 참석하는 정성을 보였다.

27일은 비가 내리기 때문에 옥외 행사를 못하고 성당 안에서 주교 환영식만 있었고 28일 오전에 성당 축성과「영신학교」교사(校舍) 강복식이 거행되고 오후에는 견진성사 수여와 성체강 복식이 거행 되었는데 본당신부는 진안본당 첫 주임이며 영신 학교의 설립자인 김양홍 (金洋洪=스떼파노)이다. 김양홍 신부는 1874년에 출생, 「페낭신학교」 (빠리外邦傳敎會 경영)에 유학하였다가 1892년 한국 신학생들이 서울 용산 신학교로 귀국할 때 같이「예수 성심 신학교」로전와 함께 사제로 서품되었고 훗날(1937년) 본방인 첫 자치 교구(全州敎區)장이 된 이다.

9월 29일 안 주교 일행은 진안본당을 출발, 전주로 다시 갔다가 9월 30일 전주서 수류본당(金堤郡水流面上禾里 水流天主堂) 으로 가셨는데 수류 본당은 호남 교회 초창기때「되재」전주와 더불어 3대 원류(源流)가 되는 지방이다.

1893년 4월 이 지방 전교를 담당하다가 서울 신학교로 전임된 베르모렐(張若瑟) 신부의 후임으로 모이세ㆍ조조(M.JOzeau 趙得夏) 신부가 이 지역 전교를 맡았으나 이듬해(1894년)에 동학란(東學亂)과 청일전쟁(淸日戰爭)으로 상경 도중 청군(淸軍)에게 피살되었다,

1895년 조조(趙) 신부의 후임으로 말셀ㆍ라끄루 (M.Lacrouts具瑪瑟) 신부가 금구 (金溝=金堤) 배재(梨峴)에 부임하였는데 구(具) 신부는 시대가 변하여 외국인에 대한 지방민의 적대감도 완화되었으므로 교회가 두메산골에 은거할 때가 아니라 하여 적당한 본당 처전을 찾던 중 수류에 있는 전주 이 진사의 재실을 사게 되어 수류본당이 설립된 것이다.

라끄루(具)신부는 1900년 제주도로 전임되고 제주도의 첫 전교 신부이던 갸오로ㆍ뻬네(C.Peynet襄加汞) 신부가 수류본당으로 부임하게 되어 성당을 신축하고「인명(仁明)학교」를 1908년에 설립하였는데 수류본당 교세는 소속공소 29개, 신자 총 수 2천77백55명이었다.

사진제공 해설=윤광선·영남교회사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