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나의 유스띠노 시절 ] 7. 신학교 화단

박상태 신부ㆍ대구 비산동주임
입력일 2011-05-16 수정일 2011-05-16 발행일 1982-09-26 제 1323호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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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수층제외하곤 庭園갖지못했던 시절
각종 이름모를 꽃과 꽃나무들로 만발
이 곳이 나로서는 잊을래야 잊을수 없는 모교가 되는 곳이다. 지금은 대건중 학교 정원이 조성 되어 있어 옛과는 많이 변모되어 있으나 다행히 건물만은 원형을 거의 옛날 대로 보존 되어 있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이 건물이 이토록 눈물 겹게 낡아 버리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그 원흉은 일제에 있다. 1945년 4월 일제는 기어이 그 마수를 이 곳까지 뻗혀 내 모교를 강제로 점거하고 징이 박힌 억센 구듯발길로 밟고 다녔으니 아무리 흔이 없는 건물이라 할지라도 멍이 들지 않고 배길 수 있으랴! 이로부터 퇴락되기 시작한 것이 미군이 주둔하고 경찰 학교가 들어오고 해서 공중물을 아낄리 없는 무지한 놈들만 들어와 살았으니 황폐할 수 밖에!

세상에 노쇠하지 않는 것이 있을 수 없으나 그래도 정성 되이 다듬고 자주 보수해서 썩은 것은 뺴내고 낡은것은 갈아 끼우는 등 성실하게 가꾸어 왔던들 이다. 지도 황폐하지는 않았을 것을!

그건 그렇고 대건중학교에 들어서면 첫째, 눈에 띄는 것이 성당 종각이고 이 종각은 서쪽을 향해 2층으로 양 날개가 일자로만 뻗어 나가다가 중간쯤에서 다시 90도로 꺾인다.

종각에서 북으로 뻗은 날개도 옛날 신학교 때 원형 그대로 이고 남으로 뻗은 것은 일부 훼손되어 버렸는데 북쪽으로 뻗은 것과 꼭 같은 형태였다. 이 양날개에 오목하게 둘러 쌓인 마당은 지금은 정원이 조성되어 있으나 그 때는 대신 학생들의 제 1운동장이었다. 종각을 중심으로해서 북쪽편 운동장에는 이동식 정구 코트가 하나 있었고 그 옆에 나란히 잔디를 깔지 않은「끄로켄」을 하는 놀이터가 있었다.

놀이터 건너편에는 지금은 히말라야시다가 심겨져 있고 군데 군데 운동장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다듬어져 있으나 그 때는 계단은 하나도 없었고 먼저도 말한 것처럼 제2운동장에서 올라오는, 성당 종각이 바라 보이는 큰 길 하나만 있었을 뿐이였다. 그리고 히말라야시다 대신에 아카시아 나무가 심겨져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운동장이 되고 말았지만 그 때는 언덕밑에 화단이 조성되어 있었고 여기는 작약과 모란 꽃은 물론이요 흰색 라일락, 자색 라일락, 옥매화 등 나로서는 이름 조차 알지 못하는 많은 꽃들과 꽃을 피우는 나무들이 심겨져 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당시 교장 신부님으로 계시던 엄 신부님(Emilius Taque-t)은 식물 학자셨다. 우리나라에서는 알려지지 않으신 분이지만(따지고보면 그 때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식물학을 전공하는 분이 그다지 없었을 때다)불란서 식물학계에서는 많이 알려지신 분으로 제주도에서 전교 하실때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많은 식물을 새로 발견하시고 불란서에 소개 함으로써 명성을 얻으신 분이다. 불란서에 가면「따께」라는 이름이 붙은 풀과 꽃나무가 많다는 것이다.

日人들이 자기들의 국화라고 떠받드는 벚꽃도 원산지는 제주도란 것을 입중하신분이 바로 이 분이시다. 家長되시는 분 즉, 교장 신부님이 꽃을 좋아하시니 꽃이 제대로 대접을 받을 수 있었고 또 알차게 무성히 잘자랄 수 있었다. 더우기 그 당시만해도 저 무서운 한말의 혼란, 일제의 수탈 등으로 해서 궁핍할 대로 궁핍한 이 나라에는 일부 특수층을 제외하고는 정원을 가질 만한 힘이 없었다.

고작해야 울밑에 봉선화와 분꽃 또는 꽈리를 심어 손톱에 빨간 물을 들이고 처녀들은 꽈리 열매를 따서 씨를 뺀 후 꽈리를 만들어『꽈르륵, 꼬르륵』소리를 내며 신기해하던 것이 고작이었던 시대였으니 여기 이만한 화단이 있는것은 지금으로서야 별 것 아니지만 그 때 그 시절에는 더욱이 성직자들을 신처럼 여기던 신자들에게는 화단이 더욱 더 돋보였을 것이니 전번에 말한대로 그들은 이 곳을 화원이라 불렀던 것이다. 지금 우리가 가는 길을 걷다보면「양심」「정의」「사랑」이라고 써 붙인 4층 건물이 서있으나 옛날에는 없었던 건물이고 그 때는 먼저도 말했듯이 북편 건물과 꼭같은 형태의 건물이었을 따름이었다. 이 4층 건물 끝에서 보면 비스듬히 올라가는 길의 흔적이 있는데 그 길을 오르면 짓다가 중단 된 체육관이 있고 여기가 小神學生들의 제 2운동장이 있었던 곳이다. 그 옆으로 올라가면 지금의 철조망을 지나 주교관으로 올라가게되고 서쪽으로 가면 김대건 신부님의 동상이 나온다. 그 앞을 지나면 4층 교실이 나오는데 여기에 전에 말한 옛 남산 성당이 있었다.

지금은 학교를 세우고 운동장을 만든 까닭에 수목이 없었지만 그때는 플라타너스 그늘이 우거져 있었으며 그 그늘이 어찌나 좋았던지 몸이면 꾀꼬리들이 몰려와 연주회를 벌였는데 非山非野에서 자탄 내게는 책에서만 읽었던 꾀꼬리 소리를 여기와서 처음 들었을 정도로 숲이 우겨져 있었다.

이상으로 그 당시 대신학교회 바깥 상황은 설명한 셈이나 워낙 필재가 없는 데에다 그려야 할 상황이 너무 복잡해서 독자들이 읽기에 너무 번거러웠으리라 생각되어 죄송한 마음을 가누기 어렵다. 사과를 드리면서 이제는 내부구조에 대해서 붓을 옮겨 보겠다.(계속)

박상태 신부ㆍ대구 비산동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