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나의 유스띠노 시절 ] 6. 구 남산성당

박상태 신부ㆍ대구 비산동주임
입력일 2011-05-16 수정일 2011-05-16 발행일 1982-09-12 제 1321호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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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밭으로 가꾸어져「花園聖堂」이라 불리워
男女신자간 볼수없도록 광목으로 휘장 쳐
성모당에서 내려와 교구청 현관에 이르러 正北을 향하면 돌계단이 밝히는데 이것은 옛날 그대로다. 그 계단을 밟고 10여보 내려오면 교구청 西門(신학교 서문도됨)에서 성직자 묘지로 통하는 길이 나오고 그 길을 건너려면 낭떠러지가되고 그 밑에 김대건 신부님 동상이 서있다. 이 어름이 옛과 크게 다르다. 옛 모습대로 그려보자. 옛날에는 낭떠러지가 아니고 돌계단이었는데 그 폭은 지금 교구청앞에 남아있는 돌계단의 그것과 같았으며 계단수는 6 ~ 7개가 아니었던가 생각 된다.

계단을 내려와 조금 걸으면 이미 말한 바 있는 주교관 앞마당으로 통하는 길, 즉 플라타녀스 가로수가 우거진 길이 나오고 그 길을 건너면 신학교로 가게되고 건너지 말고 바로 서쪽으로 가면 옛 남산 성당이 나온다. 「남산성당」이라 하니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데 내가 어렸을때 조부님을 따라 花園성당에 미사참례를 하러 간적이있다. 그 당시는 옛 남산성당을「웃성당」혹은「화원성당」이라 했다. 웃성당이라 함은 明治町성당보다 지형적으로 높은곳에 있었기 때문이요, 화園성당이라함은 이 성당이 화원에 있었기때문이다. (여기서 말한 화원 성당을 경북 달성군 화원면 천내동에 있는 花원성당과 혼돈하지마시기를. 혼돈을 피하기위해 앞으로는 옛 남산 성당이라 기록 하겠다.)

그당시 신자들은 성당과 성직자들에 대한 존경심이 어찌나 컸던지「너무 과하다」는 생각이 들정도로 극진했다. 성직자들이 있는 곳이면 거룩한 곳이었고 꽃밭으로 여겼기 때문에 이 동산을 꽃밭 즉 花園이라 부른상싶다. 과연 이 동산에는 성당이있고 성모당이 있고 主敎堂이 있고 신부 · 신학교가 있었을뿐 그의 다른 건물들은 하나도 없었으니 당시의 신자들은 이 동산을 聖地처럼 여겨 花園이라 불렀던 것이리라.

뿐만 아니라 나중에 말이 나오겠지만 화원이라 불리워도 부끄럽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꽃밭으로 가꾸어져 있었다.

남산성당을 옛날에는 화원성당이라 불렀다는 말을 하고나니 갑자기 하나 생각나는 것이있다.

신학교에 들어가기전 조부님을 따라 화원성당, 즉 남산성당에 미사를 참례하러 간 적이 있었다. 성당안에는 광목으로 휘장을 쳐 남성 신자측에서나 여성 신자측에서나 다같이 제단과 미사 드리는 신부님을 볼 수 있지만 남 · 녀 신자 측이 서로를 볼 수 없도록 해놓은 것을 보았다. 그때만해도「男女七歲不同席」이란 朱程學流의 유교사상이 판을 치던 시대라 성당안에서도 內外가 심했다. 그 당시는 그저 그러더니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우습기 짝이없는것이라 여겨진다.

남녀관계란 물흐르듯 자연스럽게 흐리도록, 그러나 옆 길로 새지 않도록 해야 한다.

말하자면 어린아이들이「男性」이라「女性」이다라는 性에 악센트를 둘줄 모르고 다같이「사람」이라는데 악센트를 두어 性에는 무관심하게 지내듯이 自然스럽게 지내도록 유도 해야지 인위적으로 마치 솔뚜껑으로 자라잡듯이 무모하게 억지로 가로막으려 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가로막는다고 막아지는 것이 아니며 자칫 잘목하면 호기심만 자극해서 비밀스럽게 행동하다가 참으로 큰일을 저지를 위험이있으니 말이다.

필자의 寡聞의 탓으로 잘못 알고 있는지는 모르나 內外風習이란 고구려시대나 신라시대에는 없었고 고려때 그것도 말엽에 와서야 수입되어 조선조에서 성해던 朱程學의 영향을 받은 유교의 풍습이지 우리 배달민족의 옛 부터의 풍습은 아닌 것이다.

이렇게 말한다고해서 남녀 관계가 마구잡이로 다루어져도 좋고 특히 과년한 자녀를 둔 부모들이나 웃어른들의 관심이 자라나는 세대의 이성관계에 소흘해도 좋고 방임해도 좋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관심 있게 보살피고 주의 깊게 대처하되 지혜롭게 하라는것이지 휘장을 둘러치는 따위의 치졸한 방법만은 지양 해야 겠다는 것이다. 간섭이 노골적이고 도를 넘치면 오히려 호기심만 자극하여 그것을 막을 때 반발심만 앙양케되고 비밀한 장소로 잠적케하는 결과를 가져 올지도 모를 그런 어리석음을 저질러서는 안되겠다는 것이다.

그건 그렇고 다시 계속하자. 옛 남산성당(지금은 대건학교 교실이 서있다) 언덕밑에 (지금은 대건학교 운동장이다. 이 운동장은 전에 플라타너스가 우거진 도로를 깎아 없애고 크게 넓혔다)그다지 넓지 않은 대신학생들의 제 2운동장이 있었는데 앞에서 말한바 있는 春雨一過後면 竹筍이 버릇없이 목을 쭈욱쭈욱 뺴올리던 곳이다.

그때는 여기서 주로 축구를 했는데 그 당시 축구라야 지금처럼「꼴대」를 규격대로 세워두고 정원을 맞추어 하는것이 아니고 공을 차서 높이 올리는 사람이 공을 잘차는 사람으로 여겨지는 정도의 운동을 하는 곳이었다. 그럴 수 밖에 없는것이 그 때는 대신학생과 소신학생이 분리돼 있었고 대신학생들 전원을 모아봐야 20명 안 팎 인데다 각자 사정이 있을터이니 비록 학교 규칙은 휴식 시간에는 누구를 막론하고 운동장에 있어야 한다고 되어 있긴 했지만 전원을 다 모으기도 어려운터라 정식 경기는 아예 엄두도 낼 수 없는 형편이기도했다. 아까 제 2운동장이라 했는데 그럼 제 1운동장은 어디 있었느냐 하면 이 운동장 북쪽 끝 대발있는 곳에서 東으로 향하면 주교관으로 올라가는 플라타너스 우거진 큰길이 나오고 그 길을 건너면 폭이 약3m되는 비스듬히 경사진 길이 나오며 그길을 건너 약5 ~ 6m 올라가면 신학교마당 (제1운동장) 에 둘러서게된다. (계속)

박상태 신부ㆍ대구 비산동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