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그들 속에서 주님을 찾는다 - 공소사목체험기] 1

원 마르가리따·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꼬수녀회
입력일 2011-05-09 수정일 2011-05-09 발행일 1982-02-07 제 1291호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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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일치된 한형제” 전해주고파
젊은층 많은 편-배우려는 열의 대단
회장집 사랑채로 쓰던 어두컴컴한 방이 공소강당이며 숙소
다음은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꼬 수녀회가 지난해 12월부터 강원도 정선군 임계면 끌지리공소에서 공소사목 활동을 전개한 체험을 적은 글이다. 본보는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꼬수녀회의 3명의 수녀가 산간벽지 공소에서 그곳 주민들과 함께한 생활을 통해 여러가지 측면에서 경험한 공소사목 체험을 5회에 걸쳐 연재, 외딴지역 소외된 형제들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고자 한다.

강원도 정선군 임계면 골지리 공소-.

섬기는 자의 자세로서 모든 사람을 사랑하기 위하여, 특히 가난하고 소외된 우리형제들에게 하느님 안에서의 삶이 얼마나 좋은지를 우리의 생활로써 보여주기 위하여, 특히 가난하고 소외된 우리형제들에게 하느님 안에서의 삶이 얼마나 좋은지를 우리의 생활로써 보여주기 위하여 우리 젊은 수녀 세 사람은 이렇다할 주비나 뚜렷한 계획도 없이 그곳엘 찾아갔다. 함께 사는 것, 모든 것을 함께 나누는 것, 아무리 외따로 떨어진 산골에 사는 공소 신자들이라도 교회 안에 일치된 한 형제라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가 서로 일치하고 사랑해야 하리라 생각하며, 우리 공동체 이름을 「성삼 공동체」라고 지었다.

그곳에 간것은 지난해 12월18일이었다. 먼지가 뽀얗게 일어 안개처럼 뽀얗게 차창을 가리는 좁은 길이 굽이굽이 산을 감고 이어지고 그 밑에는 낭떠러지였다. 운전하기에 매우 어려운 길이라고 생각되었다.

인적 없는 첩첩 산중을 달리다보면 인가가 더러 보이고 또다시 산만 보이다가는 다시 마을이 나타나곤 하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주님께서 우리를 도구로 삼아 주시기 위해 이곳으로 부르심을 감사했다.

『주 하느님 지으신 모은 세계…』마음속으로부터 노래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길이 험하여 차가 하도 덜컹거리는 바람에 희안한 요들송 같은 목소리가 되어 나왔다.

여름에는 너무나 바빠서 지키기도 힘든 주민들의 사정을 생각하여 겨울에 간 것이었으나 겨울에도 그들은 너무나 할 일이 많았다. 별로 넓지도 못한 논 밭에 농사만 지어 가지고는 생활하기가 어려우므로 많은 남자들이 매일 한 시간 이상을 걸어서 은광에 다니고 있었고 여자들은 삼을 삶아 베를 짜고 30리 길을 걸어 약초를 캐어 생계를 꾸려 나가고 있었다.

아시는 분은 알겠지만 베 한필 짜는데 얼마나 많은 손이 가고 시간이 걸리는지 모른다. 그리고 약초를 캐어 짊어지고 먼 길을 걸어와 뿌리를 다듬고 물에 불렸다가 껍질을 까는데, 모양은 생강처럼 울퉁불퉁하게 생긴 것이 껍질 까기가 어찌 힘드는지 주민들은 손에 약초물이 들어 검고 거칠었다. 새벽 동트기 전부터 밤늦게까지 쉴새없이 힘들여 일을 해도 수입은 겨우 생계를 이어가고 아이들 교육시키기에도 벅차다. 더구나 중고등학교가 적어도 임계까지 가야 있으므로 그곳에서 따로 자취를 하려면 학비외에도 1년에 몇십만원이 들기 때문에 국민학교만 졸업하고 중학교를 못간 사람들도 많았다.

보통 20세 전후에 결혼을 하여 젊은 부모들이 대부분이었고 집집마다 대체로 아이들이 많았다.

그리고 어느 집이나 제일 위의 아이들 한 둘씩은 대도시의 공장 등에 일자리를 얻어 나가고 없었다. 그래도 젊은 아빠들과 청년들이 다른 곳에 비하면 많은 편이고 또한 매우 열성적이라서 앞으로 희망이 많은 공소였다. 그들 중에서는 꾸르실료나 원주 교구청에서 열리는 교육에 참석하고 온 사람도 몇 분이나 있어서 자발적으로 교리 공부도 하며 여러 가지 배우고자 하는 열의가 대단하였다.

그러나 임계에 댐이 생기면 수몰지구가 될 곳이라서 집이나 땅을 사고 팔지도 못하고 증축 허가조차 나지 않아 신자 수에 비해 비좁은 공소 강당은 그야말로 차곡차곡 끼어 앉아야 할 정도였다.

공소 강당이라고 하지만 건물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회장님 댁 사랑채로 쓰던 방 두개를 터서 비닐장판을 깐 온돌방이었는데, 한자 폭 밖에 안되는 좁은 툇마루가 붙어 있었고 좀 잘사는 집 안방하나 크기 정도의 방이 바로 공소였다. 방은 어두컴컴 하였고 십자가와 액자 두개, 그리고 십사 처 그림들이 빙 돌려 걸려 있었는데, 나무를 땔 때 이외에는 냉방이므로 방석들이 차곡차곡 몇십장이 쌓여 있었다. 나무를 깎아서 그 위에 검은 칠을 한 칠판이 하나 걸려 있었는데, 오랫동안 사용한 모양으로 칠이 벗겨져 허연 나뭇결이 드러나 분필 글씨가 잘 보이지 않았다. 맨 윗목에는 제대가 있고 미사 때 외에는 검은 커튼으로 막아두고 있었다.

그 방이 바로 공소 강당이며 동시에 우리의 숙소였다. 공소 예절, 공동 기도, 교리 공부, 성가 연습, 어린이들의 유치원, 모임이나 오락, 우리들이 먹고 자는 것 등등 모든 것이 이 안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우리 셋만의 일상은 별로 없이 하루 종일 개방 상태였다. <계속>

원 마르가리따·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꼬수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