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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문화재순방] 6. 사적290호 대구 계산동성당

입력일 2011-05-09 수정일 2011-05-09 발행일 1981-12-25 제 1286호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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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지방 최초의 본당으로 고딕식 건물
신나무골ㆍ새방골 거쳐 1897년 현위치에 성전 건립
십자형와가 성당소실로 1900년 재건
문공부로부터 금년 9월 25일자로 史蹟290호로 지정된 대구대교구 주교좌 계산동성당은 대구대교구의 얼굴이자 대구 최대의 성당이다.

대구직할시 중구 계산동 2가 71번지에 위치、뒷편에는 효성국민학교를 끼고있는 계산동본당은 대구대교구의 주교좌 성당으로서 그 위엄과 위용을 갖추고 그 역할 완수의 전당으로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계산동 본당성당은 다사다난 했던 대구교구의 역사와 더불어 처음 초가(草家) 몇棟에서 시작、木造瓦家型、또 화재로 인한 소실、신축、증축을 거듭하면서 지금의 성당으로 있기까지 성당 변천의 역사도 파란만장 하다.

영남지방의 첫 본당이며 경상남북도를 통해 유일한 본당이었던 대구본당이 설정되기는 한불수호조약이 체결된 1886년 이었으나 당시의 상황은 드러나게 포교활동을 할 수 없었다.

첫 본당신부였던 김보록(로베르) 신부는 신나무골(現 신동)에서 또 새방골(대구 이현공당내ㆍ현재 없음에서 5년간을 은신 전교, 1891년 비로소 대구 읍내로 진출했지만 대어벌(待御伐ㆍ현 인교동 및 壽昌洞일대)에 있던 鄭承旨(鄭圭鈺ㆍ바오로)의 집을 임시성당으로 6년간 사용해 오면서 1897년 현재의 계산동에 본당자리를 잡고 초가 몇동을 구입했다.

金 신부는 이 초가를 임시성당과 사제관으로 사용하면서 성당건립을 준비、2년후인 1899년 순한국식 목조 와가 십자형 성당과 2층으로된 신부 사랑(사제관)과 본당 사무소 건물 신자집회소(강당)겸 교육관인 해성재 건물 등 부속건물을 건립、1899년 성탄날 뮈뗄(閔德孝) 주교 주례로 축성식을 갖게됐다.

실로 본당설정 14년만의 성전건립이라 당시 신자들과 金신부의 감회는 이루 말할 수 없었고 이날 축성식에는 지방관헌들 대거 참석、풍성한 잔칫상을 방불케했다.

그러나 이 십자형 와가성당은 축성 1년만에 원인불명의 화재로 소실되는 비운을 겪어야 했다. 하지만 신자들은 이에 좌절 하지 않고 1900년 다시 성당신축에 도전、1902년 준공을 하기에 이르렀고 1903년 11월1일 뮈뗄 주교 집전으로 역사적인 헌당식을 거행케 됐다.

건평 300ㆍ64평의 고딕식으로 지어진 계산동 성당은 건물길이가 103尺、폭이 42尺、종각높이가 81尺으로 입구는 뾰족 아치형이며 천정은 반원아치형의 주희랑과 좌우희랑으로 되어 있으며 재료는 흑색과 적색을을 벽돌을 사용했다.

시공은 당시 서울의 약현과 종현(明洞)성당 공사의 경험이 있는 中國人 기술자 약20명(木工 煉瓦工 미장 등)에 의해 이루어졌고 건재중 벽돌은 현장에서 벽돌공장을 만들어 공급했으며 기타 재료는 프랑스와 홍콩에 주문 수입했다.

오늘날 처럼 시멘트가 없던데다 大邱城(철거 1906년)이 버티고 있어 城門이었던 당시 성당은 대구읍 성 남쪽 성밖 옆 지점에 위치、성당 서쪽 대문밖은 개천과 논ㆍ미나리 강이 있었다.

따라서 철도도 부설되지 않았던 당시 건재수송은 가장 큰 어려움중의 어려움이었다고 한다.

한편 성전건립의 경비는 중진신자인 徐相燉 (아우구스띠노)과 鄭승지가 주로 부담했다.

이렇게 온갖 어려움속에서도 金 신부를 위시한 몇몇 신자들의 투철한 사명감、그리고 신자들의 협조로 이루어진 계산동성당은 다시 1918년 중축공사를 단행、金鍾學(베드로)과 韓潤和(야고보) 등 두신자의 자금지원으로 종각 지붕과 성당 東ㆍ西ㆍ北面을 증축했다.

따라서 종각지붕의 높이는 배로 높아지고 제대를 중심으로 해서 제대 뒷편이 넓어져으며 좌우 날개가 생긴것이다.

대구대교구 설정 70주년과함께 성전완공 70년을 맞이한 올해 계산동성당이 사적으로 지정된 것은 뜻깊은 일이지만 성당관리와 조경、그리고 초기신자들의 피나는 노력을 바탕으로한 그 역사적 배경을 깊이 인식、보다 나은 내일에의 성장을 이룩하는 것은 모두의 숙제이기도 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