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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사의 민족사적 의미] 3. 어린이의 인격발견

조광·동국대 교수
입력일 2011-05-03 수정일 2011-05-03 발행일 1981-03-22 제 1247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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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의 무지 일깨워 인간평등의식과 함께 근대화 촉진
아동보호기관창설 - 어린이 영혼구제·기아 육사업 실시
최초로 어린이 인격존중에 앞장
조선왕조에 있어서 어린이의 존재는 매우 불안정한 것이었으며, 어린이는 완전한 인격체로 인식되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 어린이에 대한 관념은 매우 미숙한 상태에 머물러 있었으므로 전국적인 규모로 실시되던 인구조사과정에서도 이들의 존재가 무시되는 경우도 흔히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천주교회는 어린이 인격의 존엄성을 강조하였고 영혼을 가진 고귀한 존재임을 역설하였다. 그리고 위험에 처해있는 어린이의 보호를 장려하였고, 교회가 이를 스스로 실천해 나갔다. 어린이의 영혼을 귀중히 여겼던 까닭에 교회창설 초창기부터 교회는 죽을 위험에 놓여있는 어린이에게 대세(代洗)를 장려해왔다. 또한 정부당국으로부터 교회가 심한박해를 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반복되는 흉년과 그에 따른 경제난으로 인해 버려진 어린이들을 돌보기 위해 교회는 많은 노력을 경주하였다.

교회에서 어린이의 존귀함을 강조해서 가르쳐 왔기에 1819년에 순교한 趙淑은 위험가운데 놓여있던 어린이를 돌보고 그들에게 代洗를 주기위해 많은 노력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19세기 중엽에 활동하였던 崔良業 신부도 어린이들의 교육에 커다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최양업 신부는 바쁜 전교생활 중에서도 어린이에게 교리문답을 자신이 직접 가르쳤던 것이다. 또한 그는 1849년 한해동안 어른 1백 81명과 어린이 94명에게 영세를 주었다. 어른 영쎄자에 비해서 어린이 영세자의 비율이매우 높은것은 최양업 신부가 가지고 있던 어린이에 대한 관심의 결과로 생각된다.

또한 교회에서는 1854년 어린이를 특별히 돌보기 위해「어린이회」를 만들었다.

이것이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조직된 어린이 보호단체였다. 어린이회를 세우고 이를 유지시켜 나가는데에는 메스트르 신부의 공이 컸다. 메스트르 신부는 박해가 계속되던 중에서도 버려진 어린이들을 모아 보호하는 기관을 세웠던 것이다.

그는 어린이들을 다른 사람들이 모르게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원치 않더라도 도와 주기로 하였다.

「어린이회」의 사업은 두가지의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즉 어린이회의 첫번째 목적은 죽을 위험에 있는 어린이들에게 대세를 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두번째로는 버려진 어린이들을 거두어 키우는 일이었다. 그런데교회에 대한 정부당국의 박해로 말미암아 이 어린이회의 사업은 은밀히 진행될 수 밖에 없었다.

교회에서는 조금이라도 위험한 일은 피하기 위하여 버려진 어린이들을 거두어 신자 가정에 나누어 주고, 그들의 나이가 차서 다른 보살핌이 없어도 될때까지 그들을 먹이고 키우게 하였다. 그리고 그들에게 생업을 가르치고 일자리를 알선해 주고자 하였다. 이러한 일에 소요되는 비용은 교회에서 부담하였다. 1859년의 통계에 의하면 이와같이 어린이회의 사업기금으로 신자 가정에서 양육되고 있던 어린이의 숫자가 43명으로 나타나고 있다.

또한 어린이회는 죽음에 처한 어린이들에게 대세를 주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였다. 즉 어린이회가 창설된 당시 교회는 어린이회의 사업중 하나로 대세를 주는 사람 3인을 임명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어린이들을 치료하고 구제하기 위하여 중요한 도시에 약국을 설치하고자 하였다.

어리이를 위한 사업는 1866년의 병인박해로 인해 좌절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교회에서 어린이보호 사업에 다시 착수하게 된 때는 1880년이었다. 당시 조선왕국은 그 문호를 개방하였고, 교회에 대한 박해가 종식될 기미를 보여주고 있었으나 완전한 신앙의 자유는 인정되지 않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는 버려진 젖먹이들을 위해 유모를 고용하였고, 의지할 것이 없는 어린이들을 모아 신자 가정에 위탁하여 양육시켰다.

그리고 韓佛조약이 체결된 이후에는 건물을 구입하여 버려진 어린이들을 수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리하여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어린이를 위한 사회사업기관이 교회의 손에 의해 세워지게 되었다.

우리의 교회사에서는 이와같이 어린이의 영혼을 구제하려던 노력과 함께 어린이를 보호하려던 구체적인 행동이 드러나고 있다. 이는 어린인이의 인격에 대해 교회에서 강조해 왔던 결과로 생각된다. 어린이의 인격을 제대로 평가받도록 하기위한 교회의 노력은 전통적인 조선왕조 사회가 가지고 있던 어린이에 대한 오해와 무지를 일깨우는 것이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한국사의 발전에 미친천주교회의 긍정적인 영향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천주교회는 어린이 인격의 존엄성을 우리에게 강조해 주었다. 그리고 어린이 인격의 존엄성을 우리에게 강조해 주었다. 그리고 어린이 인격의 존엄성에 대한 인식이 당시의 교회에서는 어린이 보호운동으로 표현되었다. 이러한 인식과 행동을 통하여 천주교회는 우리나라 역사의 전개과정에서 근대정신을 키워주고 있었다.

그리고 어린이 인격의 존엄성에 대한 인식은 초창기 교회가 드러내 주었던 평등의식과 함께 우리나라 근대사회의 형성을 촉진시켜 주었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천주교회사의 한국사적 의미가 드러난다.

(계속)

조광·동국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