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죽음의 압록강 - 초대 주한교황사절 방 주교의 최후] 2. 숨막히는 은신…체포의 순간

입력일 2011-05-02 수정일 2011-05-02 발행일 1980-12-25 제 1235호 6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모든것 몰수당하고 명동대성당서 2주간 피신끝에 피체 끌려다니다 졸도까지
화요일 밤새도록 두 선교사는 북쪽으로 쉴새없이 날아가는 요란한 총성을 들었다. 매시간마다 총성은 점점 가까이 들려왔다.

수요일 아침 해뜨기전 국군들이 교황사절관 앞을 지나가는 빠른 발걸음소리가 들렸다. 아침나절까지 총격은 계속됐다. 그후 파괴로 얼룩진 도시에는 갑자기 침묵이 흘렀다.

방 주교는 기도서를 들고 열러진 문옆에 앉아 공산군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그는 대단히 침착했으며 이윽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아마 그의 마음은 워싱턴 DㆍC에서의 어린시절로 되돌아가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는 지금은 대법원이 위치해있는 쪽에 자리잡고있던 집에서 태어났었다.

아니면 그의 마음은 젊었을때 자기형과 함께「포토막」강에 보우트놀이 갔던 때를 회상하고 있었느지도 모른다. 그곳에서 그의 형은 물에빠져 숨지고말았다. 그 사건은 바로 방주교에게 자신이 삶을 냉철히 반성하도록 만들었으며 그것은 곧 그가 사제직에로 나갈 결심을 굳힌 계기가됐다.

그가 사제로 서품되었을 무렵에 리홀회가 설립돼 그는 수도회를 지원. 입회를 허락받음으로써 새외국선교회에 가입한 첫번째 사제가됐다.

방 신부는 미국내에서 요직을 두루거쳤다. 그러나 1923년 그는 북한의 메리놀활동 개척자로 처음 한국에 파견됐다. 수년동안 그는 메리놀회 책임자로 일해왔다.

그는 1935년 일본에 메리놀회를 전파하도록 선발됐다.

그는 세계제2차대전동안 섬왕국에 남아있었다. 일본이 마침내 항복을 선언했을때 그는 전국방송을 통해 미점령군이 자기들을 해치지 않을것임을 납득 시켰다. 그는 일본국민의 두려움을 해소시켜주었으며 전쟁의 공보로부터 그들을 보호해 주었다. 됫날 맥아더 원수는 증언했다. 『방 주교님은 우리에게 크나큰 도움을 베풀어 주셨읍니다. 그분은 용감하고 기략이 뛰어난 분이었읍니다. 그분은 모든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읍니다』

그후 「로마」로부터 그를 주교로 임명함과 동시 한국주재 교황사절로 발령한다는 소식이 전달됏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처음 선교활동을 시작했던 땅을 다시 밟게됐다. 그러나 그땅은 옛과는 달리 두동강이 나있었다.

그후 서울 명동대성당에서 주교로 성성됐다. 방주교는 북으로부터 언젠가는 밀어닥칠 남침에 대비해 벌써부터 신부들과 신자들을 준비시키는데 힘을 기울여왔다. 바로 그날이 지금 온것이며 방주교는 곧당도할 공산주의자들을 기다리면서 조용히 앉아있었다.

방주교는 오래 기다리지 않았다. 북괴군 일개분대가 행군해 들어와 부스 신부의 찜을 압수했다. 곧이어 또다른 분대가 들이닥쳐 방주교의 승용차를 몰수했다. 그뒤를 이어 마지막으로 공산당 동조자들과 제5부대원들이 집안으로 들어와 약탈을 개시했다.

『당신들은 그 물건에 손댈 권리가 없소』방주교는 소리쳤다.

『당신은 천국을 믿소?』한 북괴군이 질문했다.

『물론이지요』

『아아 그래요』그 공산군은 자기권총을 손가락으로 만지며 협박하듯 중얼거렸다. 『당신은 머지않아 그곳에 가게될거요』

무슨 영문에서인지 학실치는 않지만 북괴군은 방 주교를 즉시 체포하지 않았다. 또 이 집안의 움직일수 있는것이라곤 모두 다빼았겨 버렸기에 방주교와 부스 신부는 대성당사제관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그곳에서 거의 2주동안 숨어살았다. 한국인 수녀들이 매일 이들에게 식사를 배달했으며 한국인신부들은 서울시내에서 벌어지고있는 몸서리처지는 참사소식을 전해주었다.

7월 11일 저녁무렵 방주교는 윗층 베란다로 올라가는 모험을 감행키로 결심했다. 그날은 무덥고 숨막힐듯한 더윌 그는 신선한 공기를 호흡할 필요를 절감했다.

이와함께 북괴군이 수주동안이나 그를 체포하지않고 버려둔것은 아마 그에게 주의를 게을리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방 주교는 북괴군이 구내로 들어와 그를 보았을때 간신히 베란다위에 모습을 드러내보이고 있었다. 방주교와 부스 신부는 한국인신부들에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위해 곧바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들은 무더위때문에 수단을 입지않고 바지에다 셔츠만을 입고 있었기에 북괴군들은 그들을 보자마자 급히 밖으로 끌어내 찜차속으로 밀어넣었다.

방 주교는 급변한 상황의 「아이러니」에 웃음을 금할수없었다. 자기들을 감옥으로 데려가는 그 자동차는 바로 얼마전까지 캐롤 신부가 타고다녔던 북은색 소형찜였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북괴군들은 방 주교의 승용차나 부스 신부의 짐처럼 그차도 「차용」한것이었다.

두사람은 감옥으로 변해버린 서울중앙부에 위치한 공공건물로 인도했다.

그들은 악취가 코를 찌르고 숨이 막힐듯하 지하실로 끌려가 수백명의 다른 수인들과 함께 갇혔다. 그들은 북괴관리들이 수천명의 한국인들을 면접하는 공포의 8일동안 이 용광로의 모퉁이에 떼를 지어 갇혀있었다. 매번이 면접이 끝날때마다 형이선고됐다.

어떤 사람은 사형에 또 다른 사람은 투옥되고 더러는 풀려나가기도 했다.

지하실 윗방들에서는 고문이 계속댔다. 지하실에 갇혀있는 수인들은 남성들의 고통의 절규와 여인들의 비명소리를 들을수있었다.

매일 수인들에게 주어지는 유일한 급식은 더러운 신문조각에싼 조그마한 쌀과 보리밥 한뭉치와 작은컵의 물 한잔 뿐이었다. 더구나 방이 부족해 많은 수인들은 누울자리도 없어 밤낮으로 앉거나 서있어야만 했다.

방주교는 자기둘레의 사람들에게 자기가 할수있는 편의를 베풀어주었다. 그러나 북괴 경비병은 서로 이야기하는 것을 허용치않았다.

8일이 지난후 방주교와 그의 동료수인들은 밖으로 끌려나와 트럭위에 실렸다. 그들은 자기들을 북쪽으로 운송할 기차가 기다리고 있는 기차역으로 실려가고 있었다.

자동차에 올라타려고 안간힘을 쓰다 방 주교는 지 친나머지 그만 그자리에 졸도하고 말았다. 그의 동료 몇명이 그를 들어올려 트럭 뒷부분에 뉘였다.

『제가 졸도한것은 난생 처음이었읍니다』얼마후 정신을 되찾은 방 주교의 말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