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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임종에 대한 질문 과 해답] 15. 해학과 공포

퀴블러로쓰 저·이인복 역·문학박사·문학평론가
입력일 2011-04-19 수정일 2011-04-19 발행일 1980-01-20 제 1188호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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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들 놀라운 해학적 감성 지니고 있어 
참 사랑과 신앙은 행동에 의해서만 전달
[문]=선생님께서 보신바 임종환자에게서 나타난 해학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읍니까? 저는 풍자적인 해학이 아니라、인생과 생활에 대한 건강한 태도를 반영하는 그런 해학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저는 유모어 감각의 소유를 하나의 건강한 표징이며 또한 훌륭한 교육양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답]=저는 제가 보살피던 임종환자들의 해학을 아주 많이 즐겼읍니다. 저는 제 환자들중의 어떤 사람들과는 마음을 터놓고 웃을수 있었읍니다. 그들은 미처 다하지 못한 일이 다른 사람에 의해서 계승 지속될때에、그리고 당신이 임종환자와 더불어 웃는 것을 경망하게 생각하여 일부러 침울하고 딱딱한 표정을 짓고 그들 방에 들어서지만 않는다면 그들은 놀라우리만치 굉장한 해학적 감성을 보여줍니다. 살아생전에 훌륭한 해학적 감성을 나타냈던 사람들은、물론 임종의 순간에도 해학의 감성을 유지할 것입니다.

[문]=어떤 간호원이 여러사람이 보는 가운데 임종환자와 면담하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하였읍니다. 『제게 있어서 죽음이란 당사자 자신의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입니다. 저는 친한 친구 네명을 잃었읍니다. 이러한 공개면담은 너무도 비인간적인 처사가 아닙니까. 이 면담이 교육적으로 뜻있는 경험일는지는 몰라도 내 진정한 반응은 우리가 동물원에서 동물이 아닌 인간이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선생님의 반응은 어떠하십니까?

[답]=청중 앞에서 면담할때 나도 당신이 말씀하신 것과 똑같이 그 면담에 대해 미묘한 감정을 가집니다. 그러나 나는 그 환자가 면담을 통하여 어떤 이득을 얻으리라는 기대를 하지 않았다면 그런 면담을 자청하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환자들은 그들이 그러한 면담에 자진하여 나설수 없겠느냐는 질문을 받습니다. 많은 환자들이 그런 기회가 있느면 좋겠다고 대답합니다. 임종 예정환자들이 이런 대화에 즐겨 응하는 이유는 그들이 남의 부담이 되고 쓸모가 없고 더이상 아무것에도 가치가 없다고 느끼는 생의 종말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만일 그들에게 우리를 위해서 봉사할 수 없겠는지를 묻는다면 그들은 비록 그것이 임종의 신비를 약간 밝혀주고 또 다른 환자를 더 잘 보살필 수 있도록 우리에게 도움을 주는 정도에 불과할지라도 우선은 수주일 혹은 수개월동안 문득 자기들이 무엇인가에 공헌할 수있다는 느낌을 갖습니다. 이때문에 나는 아직도 임종환자와의 면담을 계속합니다. 저는 이면담이 비인간적이라고 보지는 않습니다. 당신이 이러한 면담을 얼마나 긴밀하고 자상하고 애정어린 행위인가를 느낀다면 당신은 비인간적이라는 언사를 그 면담에 대하여 더이상 쓰지않게 될것입니다.

[문]=환자들은 죽은을 통제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기 때문에 죽음을 재앙으로 받아들인다고 생각하십니까?

[답]=일부 사람들에게 가장 큰 두려움은 죽음이 자기들의 통제와 이해의 범위를 벗어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억압되어 있는 무의식적인 참 두려움은 죽음을 파괴적인 재앙의 요소로보고 또 우리 자신의 잠재된 과멸성에 궁극적으로 관여된다고 보는 견해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자신의 파멸성을 이해할수있다면 우리는 우리자신의 죽음의 공포를 극복할 수 있읍니다.

[문]=만약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그는 우리가그런 고통을 당하지않도록 해주실텐데? 누군가가 이렇게 말할때 선생님은 무엇이라고대답하십니까?

[답]=저는 그런말에 신경쓰지않습니다. 저의 환자들과 함께 하는님가 고통의 의미에 대하여 제 자신의 신념을 이야기할때 저는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저는 제자신의 가치관이나 철학이나 종교적 신앙을 절대로 환자들에게 주입시키고자 아니하고、다만 함께서로 이야기를 나눌뿐입니다.

[문]=어떤환자가 왜 죽어야 하는냐고 절대로 이유도 묻지않고 또 분노의 단계도 전혀 거치지 않는것은 어쩐일입니까? 신앙이 이런상태의 이유가 될수있읍니까?

[답]=그렇습니다. 깊은 신앙을 가진 환자는 왜그런일이 일어나는지 전혀 묻지않습니다. 만약 환자가 죽을 병에 걸리기전에 이미 순수하게 죽음을 용납하는 단계에 도달하였다면 그는 결코 분노의 단계를 거치지 않습니다.

[문]=임종환자에게『이것이다 주님의 뜻이겠지요』 라고 말하는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답]=저는 그런 대답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런 대답은 안이한 도피책으로 흔히 쓰이는것인데, 별로 도움이 되지않음뿐 아니라 오히려 성직자나 하는님에게 향하는더 큰 분노를 가져오는 결과가 될뿐입니다.

[문]=아무런 종교적 신앙도 없고 그렇다고 어떤 종교를 가지기도 거부하는 임종환자들은 어떻게 취급합니까? 그들에게 위안을 혹은 어떤의미를 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답]=임종환자에게 위로를 주는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읍니다. 그것은 환자의 종교적 신앙과는 아무 관계도 없읍니다. 위로란 당신이 환자곁에 있어주는 것、그의 몸을 편안하게 하고 고통을 덜어주며 등을 쓸어 주는것환자가 몸을 움직일 수 없을때 돌아눕혀 주는것、손을 잡아주고 요구사항을 들어주는것 등을 뜻합니다. 그들이 신앙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와는 관계없이 이런 방법으로 당신은 환자를 도와 줄 수 있읍니다. 참다운 사랑 참다운 신앙은 말보다는 행동에 의해서 더 잘 전달됩니다.

[문]=연구가 가치있는 경험이기는 하지만 경험 자체와 동일할 수는 없읍니다. 환자를 돕는 위치에 있는 의료진들이 죽음의 진실을 어떻게 참으로 깨달을수 있읍니까?

[답]=무엇이 진실인지는 아무도 확실히 모릅닏다. 우리는 단지 그 근사치에만 접할 수 있을 뿐입니다. 저는 우리 죽음의 진실을 잠시 들여다 보았다고 생각할 수는 있으나 그것은 죽음의 진면목을 참으로 이해했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임종환자들 그리고 그들의 문제점을 슬쩍 보아넘기는 것 보다는 의문점을 묻고 해답을 모색하는 것이 훨씬 좋습니다. (계속)

퀴블러로쓰 저·이인복 역·문학박사·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