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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말씀을 전했다 - 베버 저「고요한 아침의 나라」를 통해 본 선교의 발자취] 9. 공주의 박해현장

해설=최석우 신부ㆍ교회사연구소장
입력일 2011-04-18 수정일 2011-04-18 발행일 1979-07-22 제 1164호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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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사정 끝에 겨우 들어간 監獄
證據者의 반석같은 信仰이 보이는 듯
殉敎者들 무덤엔 제비꽃香氣만
안성에서의 마지막 날을 모뇌 미공소에서 지낸 베버 총 원장 일행은 4월22일 아침 일찍 공베르 (공)신부와 작별하고 다음 행선지를 향해 떠났다. 그들은 한 시간을 걸어 조그마한 역에 이르러 남향열차를 탔다.

그리고 한 시간 후 조치원역에서 내려 남향의 신작로를 따라 공주로 향했다

공주본주본당의 루를레(황) 신부가 한 시간의 거리까지 마중 나왔다. 그를 따라 산길을 오르내리는 사이에 돌연 강이 나타났다. 나룻배로 강을 건너니 기다리고 있던 많은 교구들이 베버 총 원장 일행을 환영하였다. 성당은 시내입구、가장 아름다운 언덕위에 자리하고 있었다. 성당에서는 전 시가를 내려다 볼 수 있지만 시가지로부터는 우거진 숲 때문에 도무지 알아 볼 수 없다고 한다 과연 성당의 지붕과 십자가만이 멀리서 보일뿐이었다.

베버 총 원장 일행은 공주에서 다시금 순교자의 피로 적셔진 거룩한 땅을 밟게 되었다. 공주는 내내 조선 8도의 하나인 충청남도의 수도였다 그래서 박해시대의 교우들은 공주에 거처하는 길사로부터 심문과 고문을 당해야했다.

공주에서 무엇보다도 베버 총원장의 눈길을 끈 것은 감옥이었다. 감옥은 낮고 검은 담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판자로 만든 감옥의 문은 아주작고 그을음으로 검게 되어 있었다. 돌여 보내 줄 것 같지가 않았지만 그래도 가보기로 했다. 전날 내린비로 꽤 물이 불어서 시내를 간신히 뛰어넘어 감옥 담 앞에 당도했다 엑카르트 신부가 담판을 시작했다 역시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베버 총 원장 일행은 그대로 돌아갈 수 없다고 버티었다. 결국 문지기가 안으로 들어가 단 한 번의 예외를 만들 수 없는지 알아보기로 했다. 문지기를 따라 낮은 문으로 기어들어가니 따라오지 말고 밖에서 기다리라는 것이다. 그래도 아랑곳없이 따라 들어갔다. 드디어 허락이 내렸다.

들어가 보니 직경30m의 둥그스럼 한 뜰 복판에 허술한 바라끄 한 채、그리고 일본인 감시인이 거처하는 함석지붕의 작은집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베버 총원장은 비바람에 낡아진 돌들을 바라보며 여기서 이루 말 할 수 없는 고통을 겪은 많은 증거자들의 초인간적인 인내와 용기와 반석같을 신앙을 상기했다.

이 때문에 결국 그들은 이곳에서 형장으로 끌려 나가야 했다. 일찍이 순교자들이 넘었던 문지방을 넘으며 베버 총 원장은 마치 로마의 춥고 침침한 「가다꼼바」에서 빠져 나올때와 같은 감정에 사로잡혔다.

형장은 시냇물에서 2ㆍ3백m 아래쪽 수목이 성긴 숲 사이 좁은 평지에 있었다. 거기 홍수로 인해 생긴 숲 밑 사장에서 순교자들은 강도와 도둑들 틈에 끼어 피를 흘렸다. 그들의 시체는 보통 沙場에 버려졌다. 그러면 언젠가는 홍수가 나서 시체를 모래속에 파묻어 버렸다. 아니면 가까운 강으로 떠내려 보냈다.

교우들은 많은 시체가 형장에 인접한 언덕에 묻혀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감히 순교자들의 무덤을 죄수들의 무덤에서 빼내지를 못했다. 이 무덤들 아래 비탈에는 마치 거기 잠들어 있는 위대한 영혼들의 성덕을 외교인들에게 상기 시키려는 듯 작고 푸른 제비꽃들의 달콤한 냄새가 향기로 왔다. 베버 총 원장은 이 제비꽃 한 송이를 갖고 돌아가 한국 순교자들의 굳은 신앙을 길이 기념하기로 했다.

<계속>

해설=최석우 신부ㆍ교회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