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이렇게 말씀을 전했다 - 베버 저「고요한 아침의 나라」를 통해 본 선교의 발자취] 6. 지방 여행길에

해설=최석우 신부ㆍ교회사연구소장
입력일 2011-04-18 수정일 2011-04-18 발행일 1979-06-03 제 1157호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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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가방속엔 그림 도구와 사진기도
군포「하우고개」선 마중나온 교우들로 긴 행열 이뤄
가난속에서도 굳건한 신앙심에 놀라
베버 총원장은 지방으로 긴 여행을 떠나기 위해 며칠 전 부터 짐을 꾸려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눈이 여행의 홍을 깼다. 부득이 날씨가 좋아지기를 기다리며 그는 다시금 여행가방을 챙겼다. 무엇보다도 그는 사진종판을 조심스럽게、또 한쪽 가방이 너무 무겁지 않게 양쪽가방에 나누어 넣었다.

그리고는 스케치를 하고 수채화를 그리고 천연색 사진을 찍을 채비도 잊지 않았다.

드디어 3월 24일 베버총원장은 손꼽아 기다리던 시골 여행길에 올랐다. 부산행 열차를 타고 수원 못미처「군포」란 역에서 내렸다. 두개의 무거운 가방을 들고 우두커니 서있는 그에게 한 안내자가 나타났다 하우고개(지금의 시흥군 의왕면의 한 교우촌)본당의「러각(곽)」신부가 보낸 교우였다.

베버 총원장이 깊은 산골짜기를 따라 한 시간 반을 걸었을 때 선생을 선두로 마중 나오는 학생들과 마주쳤다. 그 뒤에도 많은 남자교우들이 따르고 있었고 동네가 가까워 올수록 그 수는 자꾸만 불어나 그대로 행렬을 이루었다.

이 사람들을 보니 베버 총원장은 문득 이런 생각이 났다. 이 젊은이들은 아마 그들의 조상들이 왜 이고적한 산골로 오게 되었는지를 모르고 있을 것이다. 그들의 조상은 그들의 신앙을 위해 전 재산을 바쳤을 뿐만 아니라 목숨마저 바친 사람도 있다. 이렇게 그들은 가난해졌고 그들의 후손들도 가난에 만족하고 있다 가난의 쓰라림에서 그들의 신앙은 반석처럼 굳어만 갔다.

베버 총원장은 이들이 이 산골짜기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들의 전재산인 신앙을 구해준 곳이기 때문이다. 분명코 그것은 한권의 교회사 책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해주는 광경이었다. 이 교우들에게 박해가 다시 닥친다 하더라도 그들은 일순도 동요하지 않을 것이다.

교우들과 함께 베버 총원장은 성당으로 들어갔다. 성당은 낮고 작은집이어서 허리를 굽혀야 했다. 여기에 프랑스 선교사 러각(곽) 신부가 거처하며 사방 5시간 거리에 흩어져 사는 2천 5백명의 교우들을 돌보고 있다. 손자들까지 한집에 모여 사는 한국의 家父長的인 대가족제도는 자연 신부를 공동의 아버지로 모시고、공동의 아버지의 집 주위에 즐겨 그들을 모이게 했다.

3월 27일 베버 총원장은 박해시대의 유물인 동굴을 찾아나섰다. 그것은 1866년 박해 때 볼리어(서) 신부가 한때 피신했던 유서 깊은 곳이었다. 두 시간이 걸려 간신히 목적지에 도달했다.(廣州의 山畓里근일 것이다) 볼리어 신부가 가시덤불을 헤치며 그 길을 오르내렸을 것을 생각하니 감개가 무량했다.

동굴은 높이가 1m반 넓이가 3m였다. 들어가보니 안은 침침하고 바닥은 축축하였다.

바로 여기가 1866년의 큰 박해를 피하여 젊은 볼리어 신부가 은신했던 곳이다. 그는 그가 교우들 가운에 숨어있으면(廣州의 屯田里를 말함) 교우들이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므로 자진하여 이 동굴을 택했다.

볼리어 신부가 한국에 나온지는 1년 반 밖에 안 되었다.

그는 이곳 고요한 산골짜기에서 말을 배우고 있던 중 박해를 만났다. 포졸들은 잡목과 가시덤불로 뒤덮인 산길을 용케도 찾아내고 그를 동굴에서 잡아 끌어냈다. 이어 서울로 끌려가 순교하니 볼리어 신부의 나이 경우 26세였다.

해설=최석우 신부ㆍ교회사연구소장